일단, 책 등이 너무 예쁜 책이다.
책이 굵기가 꽤 되니까 할 수 있는 디자인이겠지만, 책 표지보다 책 등이 열 배는 더 마음에 든다.

원래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기지 못한 책은 리뷰를 쓰지 않지만,
절대로 끝까지 읽을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서서, 그냥 쓴다.



일단 조금 종교적이다. 주인공의 동생만이 종교적이지만 꽤 종교적인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종교를 강압하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거슬리진 않았지만, 의외로 종교적이었다.

문장은 좋다. 이야기를 잘한다. 스토리도 좋다. 인물들도 다 살아 있다.
근데 인물이 너무 많다. 이름도 다 비슷하다. 내 기억력을 시험한다.

1974년 8월 7일, 필리프 프티가 세계무역센터 빌딩들 사이를 줄타기 한 사건이 중심 소재다. 그런데 어쩐지 그냥 그건 흘러가는 이야기처럼 취급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좋은 문장과 좋은 이야기인 건 알겠는데,, 좀 지루하고 따분해서 끝까지 못 읽겠다.



좋은 문장을 쓸 줄 안다는 건 문장을 매력있게 조합할 수 있다는 이야기라서, 
소제목도 한결같이 매력적이고, 제목까지 매력적이다. 

몇 가지 소제목만 나열해 본다.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천국이 싫다는 것이 아니라 이곳이 좋습니다.'
'거대한 지구를 영원히 돌게 하자.'
'이건 그 말이 지은 집이다.'



p.55
"두려움 조각들이 사방에 떠다녀." 그가 말했다. "그건 먼지 같아. (중략) 먼지는 분명 거기 있고 사방에서 내려와 모든 걸 덮어버리지. 우리는 먼지를 숨 쉬고 먼지를 만지고 먼지를 마시고 먼지를 먹어. 하지만 너무나도 작기에 우리가 알아보질 못하는 거야. (중략)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거야. 잠시 그대로 서 있으면 바로 거기 있어, 이 두려움이, 우리의 얼굴과 혀를 뒤덮으며 말이지. 우리가 멈춰서서 이 두려움을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절망에 빠져버리게 될 거야. 하지만 우리는 멈춰 설 수 없어. 우리는 계속 가야만 해."

p.63
그녀는 후두암으로 목소리의 대부분을 잃었다.

p.72
만약 가난한 사람들이 진짜로 예수의 살아 있는 이미지라면 왜 그들이 저렇게 빌어먹게 비참한 건데? 말해 보라고, 코리건. 왜 저들이 저렇게 거리에 서서 자기들의 불행을 다른 세상 사람들 앞에서 다 보여 주고 있는 건데?

p.78
나는 대학 시절 언젠가 들었던 신화가 떠올랐다. 세상에는 서른여섯 명의 성자가 숨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보잘것없는 사람들, 목수, 구두장이, 양치기의 일을 하며 살고 있다. 그들은 지상의 슬픔을 견뎌내고 있지만 모두 하느님과 소통하는 통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어느 숨겨진 성자는 잊혀졌다. 그 잊혀진 성자는 홀로 남겨져 그가 너무나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소통의 통로를 가지지 못한 채 힘겹게 싸우고 있다. (중략) 동생은 홀로 슬픔을, 이야기들의 이야기를 견뎌내고 있었다.

p.301
"혹시 뉴욕 다운타운 근처에 계십니까, 선생님?"
"누구세요?"
"혹 우리를 위해 위를 쳐다봐 주실 수 있나 해서요?"

p.411
그냥 거기 서서, 정확하게 줄의 중간 지점, 양쪽 타워로부터 100피트 되는 그곳에 서서 눈을 감고 몸을 정지하자 줄이 사라졌다.
(중략)
그는 그가 오직 첫 발걸음에 대해서만 생각했었다는 것을, 마지막 발걸음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여전히 그 위 그곳에 있을 것이다. 슬리퍼를 신고, 검은 발로, 민첩하게. 문득문득 그럴 것이다. 고속도로를 운전하다가, 또는 폭풍이 오기 전 판자로 오두막 창문에 덧물을 대다가, 톤태나의 줄어들고 있는 초원 그 키 큰 풀밭 안에서 걷고 있다가, 또다시 공중에 있을 것이다. 발가락 사이로 팽팽한 케이블 줄을 느끼며, 바람과 서로 가로질러 엮이며, 불현듯 느끼는 높이감. 그의 아래로 펼펴지는 도시. 그의 기분이 어떻든, 어느 곳에 있든, 뜻밖의 순간에, 그것은 되돌아올 것이다. 
 




이건 좀 무섭다.
좋은 문장과 좋은 이야기가 있는데도 재밌지 않다니.  
 
내가 추천받은 책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 주게 될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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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출판된 책이다. 내 출생년도 전후로 있었던 배우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다. 
중고서점에 갔다가,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들이 붕뜨지않게 하려면, 사례집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냉큼 집어온 책이다.

책의 가치가 그 책의 가격으로 결정되는 건 아닐텐데, 싸게 샀노라며 냉큼 접어가며 읽었다.

이런 낡은 책들을 읽으면, 그 내용보다, 시간을 먼저 인식한다.
그 때의 이대부고는 머리를 길러도 되는 자유분방한 학교였고, 
그 때의 이대 사학과를 졸업한 선배는 이 책을 냈고,
그 때의 산울림소극장에서 최초로 고도를 기다리며가 공연되었단다.

그냥, 인터뷰를 모아놓은 작고 낡은 책인데도, 참 여러가지 군상이 보여서 좋았다.


---

검색을 하다 우연히 '구히서'는 오역이 그냥 필명으로 굳은 거고 작자의 본명은 구희서씨라고 한다.
그는 "순수한 것을 보면 기분 좋다. 나쁜 연극을 봐도 좋다"고 했다. 강단 비평 쪽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말이다. 연극이란 장르의 순수성에 대해 말했다. 그의 마음에 와 닿은 무대는 "난폭, 섹스 없이 깊은 감정을 미묘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영상, 짓거리가 과한 것은 싫다"며 "내 시대의 미적 기준이 좋다"고 했다."(한국일보 2010년 인터뷰 발췌)

---





자료로 그냥 써먹고 말기엔 아쉬운 책이다. 

좋은 이야기가 많은데도, 다 옛날 인물과 지나간 이야기들이라 묻혀버리는 게 아쉽다.






---------------






불편한 이야기, 작부심, 그런 것들과
불편하지 않은 이야기, 독자가 보고 싶은 이야기, 철저한 로맨스나 적당하게 슬프고 적당하게 아름다운 이야기들,
그 균형을 대충 알 것 같다.

일상에서 모두가 서로에게 감추고 있는 어떤 영역이 있다.
가령, 남들 앞에서 똥을 싸진 않는다.
그래서 소설에서 굳이 그 이야기를 매번 언급하지 않아도 괜찮은거라고 생각한다.
우린 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은 알 필요가 있지만 주인공의 소화상태 배변상태를 알 필요는 없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굳이 불편해질 필요는 없는 거다.

일상적으로 남들 앞에서 가식을 떠는 만큼만,
글과 영상에서도 가식을 떨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가식은 나쁜거라고, 또 한동안의 너무 솔직한 무리들에 휩싸여 있다보니 마냥 그렇게 생각해봤는데,,
좀 멀찍이 떨어져서 보니까, 아니, 가식은 좋은거다.

매우, 많이, 아주, 엄청, 지구를 돌릴만큼 좋은거다. 
허니와 클로버를 보면서 생각했다.
빵에 꿀과 클로버를 넣어 먹으면서 우는 장면을 그리기 위해서, 그 장면 하나에 저 제목을 지은 거란 말이냐.

앵무새 죽이기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처음엔 공기총을 아이손에 쥐어주곤 앵무새는 죽이면 안되는 새라고 말한다. 해를 끼치지 않고 마음을 열고 노래를 부른다고.
둘째론 달아나건 서있건 앉아있건 불구자를 죽이는 건 새를 쏴 죽이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부당한 처사라는 거다.
셋째론 밥 이웰의 죽음에서 혐의를 벗겨주는 테이트에게 , 그 혐의는 앵무새를 죽이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아 왜이렇게 제목을 활용하는데 천재적인 인재가 많을까. 아 짱낰ㅋ

그냥 읽기 전엔 상당히 폼재는 거만한 제목이라고 생각해서 싫어했는데, 막상 읽고 보니 좋아졌다.

부끄럽지만 사실 이 책은 부산 집 내 책장에 꽃혀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가 싫어서 버틴 이유가 바로 그거다.





p.116

언젠가 아빠는 나에게 형용사를 몽땅 빼버리고 나면 사실만 남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p.145

"아빠, 깜둥이들을 변호하세요?"

"물론 그렇단다. 스카웃, 그런데 깜둥이라고 말해선 안 돼. 그 말은 품위없는 말이거든."

"학교에서는 모두 다 그렇게 부르는데요."

"이제부턴 다른 사람은 다 그래도 너만은 그러지 않는 거야."

"제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자라는 걸 원치 않으시면서, 왜 저를 학교에 보내세요?"



p.189

"우리가 알고 있기를 바라셨다면 아빠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을 거야. 아빠가 그 솜씨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신다면, 우리에게 말씀하셨을 거라고."

"어쩌면 아빠가 깜박 잊어버렸을 수도 있잖아."

"아냐, 스카웃. 그건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거야. 아빠는 정말 나이가 많으셔. 하지만 아무 일 못 하셔도 난 상관하지 않을 거야- 아빠가 그야말로 아무 일도 못 하신다 해도 난 상관 않을 거란 말이야."



p.379

"물론 정직하지는 않다만 사람들에게 아주 도움이 되거든. 핀치 아가씨. 이거 비밀이지만, 사실 난 술을 별로 마시지 못해. 하지만 내가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에 지금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전혀,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이해하지 못해."

혼혈아들을 낳았고 누가 그것을 알아도 상관하지 않는 이 죄 많은 아저씨 말을 듣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저씨한테는 아주 매력적인 데가 있었다. 고의로 자신에게 불리하게 사기치고 있는 사람을 나는 지금껏 한 사람도 만나본 적이 없었기 떄문이다.



p.388

배심원 여러분, 법정은 제 앞 배심원석에 앉아 계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건전해야만 건전할 수 있습니다. 법정은 오직 배심원이 건전한 만큼 건전하고, 배심원은 그 구성원이 건전한만큼 건전합니다.



p.401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말이에요?"

"나도 몰라.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어. 전에도 그랬고 오늘 밤도 그랬고, 앞으로도 또다시 그럴 거다. 그럴 때면- 오직 애들만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구나. 잘 자거라."



p.441

하지만 나는 그 세계보다는 아빠의 세계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다. 헥 테이트 아저씨 같은 사람들은 놀려대려고 순진한 척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중략) 하지만 나는 남자들이 좋았다. 아무리 욕을 해대고 술을 마시고 노름을 하고 담배를 씹어도 그들에게는 내가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p.453

서 있건 앉아 있건 아니면 도망치건, 불구자를 죽이는 건 죄악이라고 잘라 말씀하셨다. 톰의 죽음을 사냥꾼이나 아이들이 노래부르는 새를 무분별하게 죽이는 행위에 견주셨다. (중략)

톰은 메이옐라 이웰이 입을 열어 소리를 지르는 순간 바로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p.528

"스카웃, 우리가 궁극적으로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멋지단다."



이 책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스토리라인이 그리 명확한 건 아니라서, 지금 적지 않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을 것 같다.

이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때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 떠올랐다.
아이의 시각으로 비판할 거 다하고 순진한 척 다하는 비열한 작가들 같으니. 좀 다른 맥락과 다른 이야기지만, 둘은 꽤 닮아 있는 것 같다. 둘 다 너무 좋다.

덮을 때 쯤엔, <수레바퀴 아래서> 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건 좀 자신이 없다. 영역을 확장하고 밤과 낮 궁시렁 궁시렁 한게 데미안인지 수레바퀴 아래서인지 잘 모르겠다.
뱀발이지만 아타락시아로 검색하면 데미안이 나올 줄 알았는데 묘한 NT가 검색되서 깜놀ㅋㅋㅋ 아프락사스는 한방이었지만.
어쨋든 아주 끝에서 낮이 찾아왔다고 하는 얘기는 너무 흡사해서 패러디가 틀림없다! 고 해주고 싶었는데, 둘 중 어느 작품인지 잘 기억이 안난다. 둘 다 아주 싫어해서 곤욕스럽게 읽었으니 그도 그럴 만 하지만.


번역 얘기를 하는 걸 참 싫어하는데,,,, 유독 일본 소설이나 NT에 그런 경향이 강한 것 같지만 내용이 쓰레기라고 그냥 말하면 될 것을 '번역을 잘 못해서'나부렁거리는 걸 듣고 있으면 화가 난다. <건지감자파이북클럽>얘기만 나오면 사람들이 번역 운운하는데, 그 것도 좀 묘하다. 재번역 출간됐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굳이 다시 읽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이 책은 번역 얘기를 안할 수가 없는 게,,, 아 왜 번역 왜 이렇게 잘함.. 어휘 하나하나가 자연스럽다. 앵무새 죽이기를 읽으려고 검색해봤는데, 꽤 오래된 책일 거라고 생각했는데도 이 책 이후의 판본이 없길래 별 기대안하고 읽었는데,,, 굳이 새로 번역할 필요가 없었던 거겠지.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일관되게 이렇게 번역해 낼 수 있다니, 천사다, 아니 어떤 의미론 악마다. 으워어..

스토리 라인은, 상당히 묘했다. 다 하나 하나가 쓸모없는 소재고 쓸모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뒤돌아보면 다 중요했다.

아마 훗날 회상해보면, 은둔자가 집에서 나왔다!!!! 는 거랑 재판에서 졌는데 죽어버림!!!! 밖에 기억이 안날거다. 나머지는 정말 뭐라 말할 수 없이 소소하다.

의외로 책 마지막 장을 덮는 뿌듯한 순간에, 모든 것이 주제로 귀결된다. 그래, 모든 인간은...



1960년대에 영화로도 제작됐다길래 스토리를 찾아보고 빵빵 터졌다.
이 소설의 산만함을 그대로 전해주란 말이야, 으아니 저런 포장의 대가들ㅋㅋㅋㅋㅋ



음, 좋았다.
좀 더 일찍 읽었어도, 좋았을 뻔 했다.
자메뷔란 단어는 내겐 낯선데, 과연 남들에게도 낯설까.


-------------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뿌연 수증기 속에서 낡은 결심이 날을 세웠다. 헤어지자.
거울을 본다.
언제 이렇게 확고한 이목구비가 생기고, 눈 아래가 짙어지고, 입이 앙다물어지게 되었을까. 고등학교 때의, 자기고집과 비대한 자아에 시달리는 그, 입을 헤- 벌린 채로 앞을, 칠판을, TV를 바라보던 그 얼굴은 어디로 간 걸까.
머리를 대강 쭉 짜서 물기를 털고 욕실을 나섰다. 어디서 타다다닥 발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같이 산지가 언젠데 아직도 내가 크게 움직이면 꼬리가 빠지게 화다다닥 고양이는 저만치 도망가서 서랍장 아래에 숨는다.  
부재중 전화가 두 통 와 있다.
수건으로 머리를 둘둘 말고 유태인이 되어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루- 고전적인 신호음이 대여섯번,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의 '여보세요-.;
전화를 걸긴 내가 걸어놓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오늘도 많이 피곤했냐는 둥, 저녁은 먹었냐는둥, 부지런히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 순순하게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이렇게 온 몸으로 웅변하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조금의 감동도 받지 못하는 내가, 과연 오롯하게 정상일까. 
어느새 수건이 느슨해졌는지 어깨에 물이 떨어진다.
'이제 그만하자.'
그래, 어딘가의 회로가 크게 설계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상처받은 얼굴을 통해서만, 아, 내가 정말로 사랑받고 있었구나, 하는 걸 확인하고, 안도하게 된다. 이건 어쩌면 습관이다.
대답이 없다.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냥 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까지 한참을 말이없다가, 그가 나를 불러세웠다.
'그거 혹시...'
잠깐을 또 망설이더니, 조용하게,
'그 남자 때문이야?'
그 남자? 무슨 쓸모없는 오해라도 한 걸까. 
'무슨 소리야?'
'그 남자한테 돌아가는 거잖아. 사실... 다 알면서도 내가 억지로 붙잡아 둔거야. 그래,... 그럼 가 봐.'
조금 비장하게, 그래서, 조금 웃기게.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가 말하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짐작가는 바라곤 전혀 없었다.  
'무슨...'
'그래, 그 남자랑 있을 때 넌 참 행복해 보였지. 잘 지내라.'
상처받은 목소리, 하지만 안도하기보다 불안해졌다.
무슨 소리- 뚝. 끊어진 전화를 다시 걸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또 훌쩍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고, 다시 주말이 되돌아왔다. 다이어리를 폈다. 늦게 술약속이 하나 있는 걸 빼면 하루종일 간만에 아무 일도 없었다. 온 몸에 힘을 빼고 털썩 몸을 던져 누웠다가, 일주일 전에 헤어진 남자가 붙여준 천장의 야광별에 시선을 붙들렸다.
그 남자?
누구를 말하는 걸까.
문득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내겐 생경한 이름도 꽤 많았다. 그래서 늘 이름 뒤에 수식어를 붙여 폴더에 분류를 한다. -우유아줌마 같이 알기 쉬운.
가족, 직장, 과거 아르바이트의 지인들, 중학교, 고등학교의 지인들, 초등학교 폴더도 따로 있다, 그리고 기타 폴더를 열었다.
그냥 분류하기 애매한 사람들의 집합이다.

스크롤을 죽 내리다가 '최재현-보고싶다'를 찾았다.
보고싶다. 
보고싶다.
보고싶다.
절대 내가 저장할 리 없는 수식어. 입에 익숙하지 않은 이름. 소름이 쫙 돋았다. 뭐야, 내가 술김에 뭘 잘못 저장했나.

대화문자목록으로 들어갔다. 텅 비어있었는데 문자보관함에 저장된 문자가 5개 있었다.
'수연아, 보고싶다. 내일 포도길 앞에서 3시! 지각하면 주거써.'
'수연아, 보고싶다. 내일 포도길 앞에서 1시! 너 한번만 더 늦어봐.'
'수연아, 사랑한다. 내일 포도길 벤치에서 봐.'
'수연아, 보고싶다. 오늘 저녁 포도길 9시!'
'야, 최재현, 지금 어디야, 나 지금 포도길인데.'

뭐야. 내 이름은 수연이가 맞다. 문자에 찍혀있는 날짜는 고작해야 9달 남짓 전이다.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까. 정말 그럴까.
섬칫해서 폰을 꺼버리고 책상 서랍의 일기장을 꺼냈다.

2010년, 작년의 일기장을 펼쳤다.  



일기장은 책등이 너덜거리도록 절반 넘는 페이지가 뜯겨나가고 없었다.

섬뜩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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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단체의 잡지를 읽고나서부터, 요즘 생각이 많다. 
지지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후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강하게 반대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훌쩍 펼쳐 든 페이지에 지금 당장 내가 썼을 것 같은 글이 있었다.

나는 그런 동아리가 있다는 걸 넘어넘어 들었을 뿐이고, 우리학교와 서울대에서는 정식동아리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그냥 개념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학문관에서 우연히 배포서가에 놓인 잡지를 보고, 대학내일이나 어딘가의 홍보책자일거라고 지레짐작했는데,
그렇게 통로에 버젓이 놓인 것 치곤 꽤 수위 높은 내용의 소수인권을 다루고 있었다.




나는 왜 남자를 사랑하는 걸까, 를 생각해본다.
왜 나는 게이가 아닐까, 를 생각해본다.

그냥 아주 쉽게 게이는 '어쩌다 사랑하게 된 사람이 동성이라서' 게이가 되었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런 이론으로 접근한다면, 난 '어쩌다 사람하게 된 사람이 이성이라서'의 몇번의 겹친 확률이 날 게이가 아니게 했을까.

아니다.
난 확연하게 보수적인 사람이고, 확연하게 남녀관계에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사회의 고정관념을 물려받아 당연하게 내면화한 사람이다. 20대의 보수 중에서도 극보수다. 자랑은 아닌 줄 안다.

그게 날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을 거다. 
여자에게 매력이 아무리 보여도 가슴이 뛰지 않게 만들었을 거다.


'왜 내가 이성을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해주지 않는 걸까'라는 말을 보고,
'게이는 이성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용어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게이다'라는 말을 보고,
그리고 내가 게이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에 섞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자,
점점 생각이 꼬인다.

섯불리 이야기했다가 오해를 낳을것인가,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해서 오해를 풀 것인가, 
둘의 사이의 어디쯤일 것 같다.

정말 인문인은 결론 없는 이야기만 하는 걸까.



------- 



2)
비슷한 맥락일지 모르겠다.
필리핀에서 이주한 다문화가정의 어머니의 인터뷰를 봤다.

아빠(남편)이 죽자 모두들 그녀가 당연히 필리핀으로 돌아갈거라고 생각했다고, 아들은 이미 온전히 한국인인데,,,, 그게 슬펐다고.
어느덧 마을에서 인정받는 존재가 되어서 옆집 아줌마의 칭찬에 농담으로 '그럼 필리핀여자 며느리 삼으실래요? 소개시켜드릴까요?'그랬더니 단박에 됐다고 했다고. 그것도 슬펐다고.

다문화가정의 언어교육이 너무 과잉지원되있어서, 다들 한국어를 배웠다가 조금만 마음에 안들면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갔다가 한다고. 
시스템을 어떻게 고쳤으면 좋겠다고.

--------



참 나는 시야가 좁은 사람이라,
누군가 내 앞에 이렇게 글을 들이밀어야 겨우 '아 이런 사람들이 이런 곳에서 이런 문제로 고충을 겪고 있구나'하는 걸 안다.

또, 결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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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연극을 두 번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저번에 이 연극을 봤을 때 남겼던 감상을 지금 다시 읽었다.
아주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봐서 더 좋았을테고, 내가 그 동안 무대예술에 많이 익숙하지 않아서 더 좋았을터였다.
처음 연극을 봤을 때 정말 신선했고, 정말 충격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 때 느꼈던 '좋음'이, 그냥 새로운 것에서 오는 충격이었을까 하는 의문에 다시 같은 연극을 보러 갔다.
2달 만이다.

그리고 다시 놀라고 다시 또 좋았다.
프린지 페스티벌 기간 중 그렇게 관객석이 비좁도록 사람이 들어차는 것도, 통로까지 채우는 것도 처음 봤다.
아무래도 이틀 올라가는 연극인데, 첫째날의 입소문이 타서 둘째날에 사람이 몰린 탓이겠지.

< 이하 사진의 출처 = 양손프로젝트 http://blog.naver.com/yangsonp>



일단 처음 느낀 건, 아무래도 저번과 이번 무대의 차이점들.
산울림 소극장에서 고작 몇 발짝 떨어진 포스트 극장인데도 무대가 주는 크기와 깊이와 기둥의 유무의 아주 사소한 차이와.. 돈주머니가 떨어지느냐 던져지느냐의 사소한 차이들. 분명 배경음악도 달라진 것 같은데 그렇게 잘 기억이 나지 않으니 패스. 

이런 사소한 것들은 넘어가고, 
연극의 얘기를 해보자.

관객이 많고 적고, 웅성거리고, 조명이 너무 어두워지지 않는데서 조금 차이는 있었던 것 같지만,
산울림 소극장에서 봤을 땐 음악이 사그라들고, 조명이 꺼지고, 흰 옷의 남자가 등장하는 게 너무 좋았다.
아주 깜깜해서 아무것도 사위가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데 하얀 색은 눈에 보이니까, 그 흰색에 모두가 주목하게 되는 게 너무 좋았다. 
종이 만 것을 휘둘러 소리를 내는 것도 긴장감을 줘서 좋았다. 무대에 대한 기대감을 가진 채, 시작 전 어두울 때 나는 소리들은 다 너무 기분 좋은 긴장이 된다.

스토리 자체는 연극의 스토리라기보다 다자이 오사무의 글에 대한 이야기가 될 테다. 
그래서 스토리의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황금풍경>은 일인다역의 소화가 너무 좋았고, 양말을 벗는 능청스러움이 너무 좋았지만, 여자배우님의 노랫소리가 들려올 때 허무함을 느껴야 하는 게 좀 곤란했다. 연극으로 채택하기엔 묘사하는 재미가 있지만, 어쩐지 시작과 끝이 없는 이야기라는 느낌. 
그것과는 별개로 여자배우님의 독백같은 그 노래랄까 허밍이랄까, 순수한 느낌이 너무 와닿았다.




<개는 맹수다>는 여러모로 너무 좋았다. 녹아있는 고민들과 표현방식도 너무 좋았다. 해설자와 등장인물, 인간과 개의 경계 없이 편한데로 연기하는 그 모든 치열함이 너무 좋았다. 태클을 걸 것도 없이 너무 좋았다. 두 배우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맞닿아 있을 땐, 정말 거기 포치가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배우가 같은 동작을, 서로 시선을 전혀 교환하지 않는 게 보이는데도, 같은 포즈로 같은 동작을 하는 그 것들이 너무 좋았다. 아 진짜 다 좋았다. 단편이라서 있을 수 있는 얘기라는 건 알지만, 이걸 어떻게 1시간 20분으로 늘일 수 있다면, 이것만으로 하나의 연극이어도 좋았을지 모르겠다.




<직소>는,, 솔직히 좀 거북했다. 단순히 내게 종교적인 이야기는 죄 거북하다. 그래도 찬양하거나 비하하는 어느쪽의 극단으로도 가지 않고, 그냥 '한 사람'의 이야기라서 괜찮았다. 풀어내는 방식 자체는 좋았다. 의자를 똑바로 쌓아올렸다가 다시 무너뜨려 엇비슷하게 쌓아올리는 방식도 좋았고, 의자를 넘어뜨리는 모든 장면이 좋았다.
처음엔 남자배우 한 분은 탐욕이거나 단순한 악(惡)의 유다를, 그리고 여자배우분은 선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사랑하는 자의 유다를, 그리고 또 다른 남자배우분은 사랑이 도를 넘어 집착하게된 소유욕의 유다를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셋이 그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도 하고. 
그런데 뒤로 갈수록 잘 알수 없어졌다.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너무 지레짐작한 것 같기도 하고, 그 모든 유다가 뒤에 가서 후회와 절망과 비참함에 다 함께 빠져들어 뒤섞이고 구분되지 않는다는 설정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모르겠다ㅋㅋㅋ 두번을 봐도 모르면 그냥 모르는거다.



대본에 흔히 쓰는 (사이)라는 게 왜 중요한 건지를 알 것 같았다. 배우의 침묵은 바로 주목과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으으으 침묵마저 좋았다. 
나레이션을 하는 내내 한 배우분은 웃음을 계속 띄고 한 배우는 계속 무표정한 게 의도였는지 어쨋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 만면의 웃음이라니ㅋㅋㅋ 계속 따라 웃고 있었다ㅋㅋㅋ

묘하게 이상한 데서 빵빵 터지는 관객분들 덕분에 좀 묘하게 계속 분위기가 밝아서 좀 수상하긴 했지만ㅋㅋㅋ 그래도 너무 좋았다.
화이팅, 화이팅//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하여, 였던가 하는 노래제목을 상당히 좋아한다.
시작한다, 가 아니라 시작된다, 라서 그렇다.

시작한다, 는 지금부터 미래를 바라보는 느낌이고,
시작된다, 는 과거에서 예정한 일들이 지금 시작되는 느낌이라서 그렇다.
굳이 말하자면 운명론 나부랭이.



1:1의 감정소모라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보면 1:1의 감정소모였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1:多 이거나 多:多의 감정소모다.

사랑얘기를 쓰려고 여러가지로 계속 생각을 해 봤는데,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사귈텐지 상상하는것만으로도 지쳐서 안되겠다.
지금은 뭘 쓰려고 들어도 살인마가 등장하거나 전쟁을 하거나 경찰서가 튀어나오고 결국 풋풋함과 거리가 멀어진다. 에라이.

그런 걸 각오하라니, 도대체가 소모하고 소모해서 남아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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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장면만 가져올 셈이었는데, 장면보다 더 길고 길고 긴 베너 포스터구나.





옛날에, 어떤 연극평론집을 읽다가 기억에 남은 구절이 있다. 확실한 단어와 어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런 맥락이었다.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극본을 쓰는 게 아니라, 신춘문예로 등단된 사람들이 연극의 극본을 쓰고, 갑자기 인정받는 작가가 된다.
우리나라의 이런 시스템이 연극을 재미없게 만들고, 사람들이 굳이 영화보다 더 비싼 돈을 내면서 연극을 보려고 들지 않는 까닭이다.

글쎄, 그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좀 옛날의 아주 낡은 책이었으니 요즘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겠고...
그냥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이번이, 신춘문예 등단 작품의 연극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모르고 있었더라면 굳이 의식하지 않고 봤을텐데, 의식하고 보니 괜히 평가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일단, 주제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연극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선명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고민되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 자연스러운 연기가 거기 있었다.
파키스탄에서 방금 막 온 것 같은 풋풋한 청년과 부산사투리의 구사가 자연스러운 아가씨와, 메마른 웃음을 눈으로 보여주는 남자.
무슨 4D도 아니고 족발냄새를 맡으며 연극을 보긴 또 처음이여서, 정말 살아있는 연극이구나, 해서 좋았고, 근데 너무 냄새가ㅋㅋㅋㅋ

웃음의 포인트도 좋았고, 파키스탄 청년의 억양도 너무 좋았고,
무엇보다 가야금 반주가 너무 좋았다.
가야금 합주같은 건 여러번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지만, 그 때도 이렇게까지 선명한 소리를 들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단지 소품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인데도 단아하게 조용히 의자에서 걸어나와 연주하시는 가야금 소리가 너무 좋았다.

연극이 끝나고 시계를 보고,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했다.
1시간짜리 연극이었다.
좋았던 점들은 충분히 언급했으니 이제 아쉬운 점을 말해보자면,
연극은 좋았지만, 1시간이라는 시간 안에 파키스탄에서 온 불법체류 노동자와 사장의 갈등이 어떻게 해결될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아가씨,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까. 웃음을 주는 존재로써, 연극 전체에 아무런 역할도 없이 그냥 장단을 맞춰주는 구실로써, 라디오 같은 소품으로 쓰였을 뿐이다. 확실히 연기는 정말 좋았지만, 그 아가씨의 배역은 도대체 뭘 위해서 존재하는 건지 나는 연극이 끝날 때까지 알 수가 없었다. 

좀 더 길었어야 했다.
파키스탄 청년이 협박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사장의 유혹에 넘어가건 그렇지 않건,
사장이 울다 지쳐 쓰러져 잠들 것이 아니라 어떤 식이든 갈등의 고조 후에 해결이 났어야 했다.



연극이 끝나고 모두들 박수를 치는데,
나는 연극이 정말 끝난건지를 알 수 없어서, 배우들이 인사할때까지 멍하니 있었다.
정말 그런 데서 끝낼 리가 없잖아...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끝난 거더라.

이런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풀어낼 수 있다니, 너무 좋았고, 연기도 너무 좋았지만,,
뭐라고 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남아있다. 



내가 덜 받아들인걸까.
작가가 덜 준걸까.

잘 모르겠다. 
지친다고 말했다. 저도 지친다고, 이젠 힘들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랜 시간을 망설인 것처럼, 이 시간도 아주 오래고 더딜 거라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대답을 하고, 계산을 하고, 언제나처럼 팔짱을 끼고, 문턱까지 나서는 길이 얼마나 짧은지 묘사할 단어를 찾을 시간도 없었다.

몇 번이고 나는 뒤를 돌아봤고, 그 때마다 뒤를 돌아 이 쪽을 보고 있는 그 사람이 있었다.
그게 늘 좋았다.
말하지 않아도, 눈치가 없어도, 내가 손을 내밀때 같이 내밀고, 내가 돌아볼 때 같이 돌아보는 게. 내가 배고플 때 같이 허기지다고 했고, 내가 입맞춰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그도 그렇게 생각했다. 재고 따지고 눈치보지 않아도 되서 좋았다.
그런데 그게 오늘에 와서는 불편해졌다.
말하지 않아도, 눈치 없는 그와 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서. 어느날 그는 힘들어했고, 나도 그랬다. 어느날 그는 슬프다고 말했고, 나도 그랬다. 어느날 그는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나도 그랬다. 그런데 한 달째 어쩔까 하고 고민하던 생각의 끝이 이 곳으로 걸음을 옮기게 했을 때, 그도 그랬던 거다.

나와 내가 연애를 할 수는 없다는 걸 좀 더 일찍 알아차렸어야 했다.
이제 남은 후회와 외로움과 그리움은 다 어쩔 것인가.

눈이 아파서 부비다가, 티끌이 들어갔는지 눈물이 나왔다. 
한 두 방울이 아니었다. 일그러지도록 펑펑 울었다.
울다 지쳐서 침대에 온 몸을 내동댕이 치고 막 잠들려는 그 순간, 그도 울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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