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로 휴가를 떠난 어머니와 집에 함께 남게 된 두 명의 형제. 승승장구해온 고지식한 성격의 시나리오 작가인 동생 오스틴, 사막을 헤매이고 다니던 방탕한 방랑자 형 리. 여기에 얼마만큼의 등장인물을 더하느냐 빼느냐가 좀 더 스토리에 굴곡을 줄 수는 있겠지만, 너무 뻔한 형제간의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런 예상을 크게 뒤집지 못하고 형제간의 갈등양상도 아주 진부적인 요소들로 점철된다.
동생은 형의 자유로운 모습을 닮고싶어하고, 형은 동생의 엘리트 가도를 부러워한다. 하지만 둘은 그 사실을 서로 모른다. 이런 진부한 설정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하나의 새로운 요소는 형이 동생의 일에 끼어들어, 동생의 작품을 뒤엎고 자신의 시나리오를 성공적으로 쓰게 한다는 것이다. 사울이라는 제3의 등장인물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동생은 자신이 그동안 매진해왔던 프로젝트를 형에게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나갔더라면 그나마 갈등양상이 확연하게 드러났을지도 모르지만 이야기는 점점 이상하게 치닫는다.
크게 아쉬웠던 설정은 세 가지 정도가 있다.
첫번째는, 동생의 영역을 침범한 형 리의 시나리오에 관한 것이다. 사울에게 '정말 훌륭한 다시는 없을 시나리오. 그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평가 받을 만한 것이었고, 계속해서 형 리가 한 탕을 해보려고 하는 소재가 되는 것이 이 시나리오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쓰는 장면이 나옴에도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나서도 그 결과는 불투명하다. 조금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었을까.
두번째는, 아버지에 대한 것이다. 극의 처음부터 동생 오스틴은 아버지에 대한 화제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못견뎌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형 리는 아버지를 모셔오겠다며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드러난 실상은 그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방랑자인 형은 잘 모르는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동생에게서 듣게 되고, 형제는 함께 눈물을 흘린다. 지나치게 신파극적인 요소로 몰고가려는 것이 갑작스러워서 어울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계속 언급되는 것에 비해 형제와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묘사된다. 아예 빼버리거나, 아니면 아예 좀 더 자세하게 다루었어야 할 것 같다.
세번째는, 어머니에 관한 것이다. 극 중에서 어머니는 남자 배우가 연기하게 된다. 연출가와의 대화 시간에 연출가께서 '좀 더 불편한 느낌을 주려했다'고 말씀하신 부분은 아주 잘 실현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전체 장면 중에 일부의 장면을 잘라낸 탓인지, 폭력을 당한 트라우마를 가진 여성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는 단서 자체가 너무 적다. 아예 그런 요소를 빼버리고 형제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트라우마를 가진 여성이라는 설정을 관객이 이해할 수 있게 했어야 옳다.
일단 처음 느낀 건, 아무래도 저번과 이번 무대의 차이점들.
산울림 소극장에서 고작 몇 발짝 떨어진 포스트 극장인데도 무대가 주는 크기와 깊이와 기둥의 유무의 아주 사소한 차이와.. 돈주머니가 떨어지느냐 던져지느냐의 사소한 차이들. 분명 배경음악도 달라진 것 같은데 그렇게 잘 기억이 나지 않으니 패스.
이런 사소한 것들은 넘어가고,
연극의 얘기를 해보자.
관객이 많고 적고, 웅성거리고, 조명이 너무 어두워지지 않는데서 조금 차이는 있었던 것 같지만,
산울림 소극장에서 봤을 땐 음악이 사그라들고, 조명이 꺼지고, 흰 옷의 남자가 등장하는 게 너무 좋았다.
아주 깜깜해서 아무것도 사위가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데 하얀 색은 눈에 보이니까, 그 흰색에 모두가 주목하게 되는 게 너무 좋았다.
종이 만 것을 휘둘러 소리를 내는 것도 긴장감을 줘서 좋았다. 무대에 대한 기대감을 가진 채, 시작 전 어두울 때 나는 소리들은 다 너무 기분 좋은 긴장이 된다.
스토리 자체는 연극의 스토리라기보다 다자이 오사무의 글에 대한 이야기가 될 테다.
그래서 스토리의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황금풍경>은 일인다역의 소화가 너무 좋았고, 양말을 벗는 능청스러움이 너무 좋았지만, 여자배우님의 노랫소리가 들려올 때 허무함을 느껴야 하는 게 좀 곤란했다. 연극으로 채택하기엔 묘사하는 재미가 있지만, 어쩐지 시작과 끝이 없는 이야기라는 느낌.
그것과는 별개로 여자배우님의 독백같은 그 노래랄까 허밍이랄까, 순수한 느낌이 너무 와닿았다.
<개는 맹수다>는 여러모로 너무 좋았다. 녹아있는 고민들과 표현방식도 너무 좋았다. 해설자와 등장인물, 인간과 개의 경계 없이 편한데로 연기하는 그 모든 치열함이 너무 좋았다. 태클을 걸 것도 없이 너무 좋았다. 두 배우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맞닿아 있을 땐, 정말 거기 포치가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배우가 같은 동작을, 서로 시선을 전혀 교환하지 않는 게 보이는데도, 같은 포즈로 같은 동작을 하는 그 것들이 너무 좋았다. 아 진짜 다 좋았다. 단편이라서 있을 수 있는 얘기라는 건 알지만, 이걸 어떻게 1시간 20분으로 늘일 수 있다면, 이것만으로 하나의 연극이어도 좋았을지 모르겠다.
<직소>는,, 솔직히 좀 거북했다. 단순히 내게 종교적인 이야기는 죄 거북하다. 그래도 찬양하거나 비하하는 어느쪽의 극단으로도 가지 않고, 그냥 '한 사람'의 이야기라서 괜찮았다. 풀어내는 방식 자체는 좋았다. 의자를 똑바로 쌓아올렸다가 다시 무너뜨려 엇비슷하게 쌓아올리는 방식도 좋았고, 의자를 넘어뜨리는 모든 장면이 좋았다.
처음엔 남자배우 한 분은 탐욕이거나 단순한 악(惡)의 유다를, 그리고 여자배우분은 선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사랑하는 자의 유다를, 그리고 또 다른 남자배우분은 사랑이 도를 넘어 집착하게된 소유욕의 유다를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셋이 그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도 하고.
그런데 뒤로 갈수록 잘 알수 없어졌다.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너무 지레짐작한 것 같기도 하고, 그 모든 유다가 뒤에 가서 후회와 절망과 비참함에 다 함께 빠져들어 뒤섞이고 구분되지 않는다는 설정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모르겠다ㅋㅋㅋ 두번을 봐도 모르면 그냥 모르는거다.
대본에 흔히 쓰는 (사이)라는 게 왜 중요한 건지를 알 것 같았다. 배우의 침묵은 바로 주목과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으으으 침묵마저 좋았다.
나레이션을 하는 내내 한 배우분은 웃음을 계속 띄고 한 배우는 계속 무표정한 게 의도였는지 어쨋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 만면의 웃음이라니ㅋㅋㅋ 계속 따라 웃고 있었다ㅋㅋㅋ
묘하게 이상한 데서 빵빵 터지는 관객분들 덕분에 좀 묘하게 계속 분위기가 밝아서 좀 수상하긴 했지만ㅋㅋㅋ 그래도 너무 좋았다.
화이팅, 화이팅//
옛날에, 어떤 연극평론집을 읽다가 기억에 남은 구절이 있다. 확실한 단어와 어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런 맥락이었다.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극본을 쓰는 게 아니라, 신춘문예로 등단된 사람들이 연극의 극본을 쓰고, 갑자기 인정받는 작가가 된다.
우리나라의 이런 시스템이 연극을 재미없게 만들고, 사람들이 굳이 영화보다 더 비싼 돈을 내면서 연극을 보려고 들지 않는 까닭이다.
글쎄, 그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좀 옛날의 아주 낡은 책이었으니 요즘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겠고...
그냥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이번이, 신춘문예 등단 작품의 연극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모르고 있었더라면 굳이 의식하지 않고 봤을텐데, 의식하고 보니 괜히 평가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일단, 주제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연극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선명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고민되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 자연스러운 연기가 거기 있었다.
파키스탄에서 방금 막 온 것 같은 풋풋한 청년과 부산사투리의 구사가 자연스러운 아가씨와, 메마른 웃음을 눈으로 보여주는 남자.
무슨 4D도 아니고 족발냄새를 맡으며 연극을 보긴 또 처음이여서, 정말 살아있는 연극이구나, 해서 좋았고, 근데 너무 냄새가ㅋㅋㅋㅋ
웃음의 포인트도 좋았고, 파키스탄 청년의 억양도 너무 좋았고,
무엇보다 가야금 반주가 너무 좋았다.
가야금 합주같은 건 여러번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지만, 그 때도 이렇게까지 선명한 소리를 들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단지 소품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인데도 단아하게 조용히 의자에서 걸어나와 연주하시는 가야금 소리가 너무 좋았다.
연극이 끝나고 시계를 보고,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했다.
1시간짜리 연극이었다.
좋았던 점들은 충분히 언급했으니 이제 아쉬운 점을 말해보자면,
연극은 좋았지만, 1시간이라는 시간 안에 파키스탄에서 온 불법체류 노동자와 사장의 갈등이 어떻게 해결될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아가씨,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까. 웃음을 주는 존재로써, 연극 전체에 아무런 역할도 없이 그냥 장단을 맞춰주는 구실로써, 라디오 같은 소품으로 쓰였을 뿐이다. 확실히 연기는 정말 좋았지만, 그 아가씨의 배역은 도대체 뭘 위해서 존재하는 건지 나는 연극이 끝날 때까지 알 수가 없었다.
좀 더 길었어야 했다.
파키스탄 청년이 협박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사장의 유혹에 넘어가건 그렇지 않건,
사장이 울다 지쳐 쓰러져 잠들 것이 아니라 어떤 식이든 갈등의 고조 후에 해결이 났어야 했다.
연극이 끝나고 모두들 박수를 치는데,
나는 연극이 정말 끝난건지를 알 수 없어서, 배우들이 인사할때까지 멍하니 있었다.
정말 그런 데서 끝낼 리가 없잖아...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끝난 거더라.
이런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풀어낼 수 있다니, 너무 좋았고, 연기도 너무 좋았지만,,
뭐라고 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남아있다.
분명,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선가, 아니면 모의고사 지문에선가, 접한 적 있는 작품이었다.
당시엔 깔깔거리고 웃고 넘길 정도로 아주 가볍고 어이없는 사랑이야기였는데,
왜 이렇게까지 와닿을까.
아주는 아니지만 조금 삐그덕 거리는 부분이 보였지만, 정말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연출 하나하나가 좋았다.
고심이 들어가 있었다.
무언가에 마음으 쏠려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심생이라 한다고 한다. 心生.
일단 그 출발이 된 소설의 본문은, 기니까 첨부하되 접는다.
< 해 설 >
이 「심생(沈生)」은 담정(藫庭) 김 여(金鑢)가 편찬한 「담정 총서(藫庭叢書)」중에 수록된 것으로, 이 옥(李鈺)의 작품이다.
이 가원(李家源) 교수가 역편한 《이조 한문 단편선》(李朝漢文短篇選, 民衆書館, 1961)에 소개된 바 있다.
18세기 이후 소설의 발달은 소설 독자층의 확대와 밀접하게 연관된 현상이었다. 특히 유교적인 도덕 관념에 깊이 젖어 있지 않고
생활에 여유를 누렸던 사회 계층의 성장에 의해서 새로운 소설 독자층이 확대되어간 것이다. 새로운 독자층으로서는 우선 서울의
중인층(中人層)내지 상인층이 꼽히게 된다. 이작품의 여주인공이 바로 이 새로운 소설 독자층의 한 사람일 것이다.
여주인공은 호조(戶曹)의 계사(計士)이었던 중인의 딸로 서울의 부유한 가정에서 한가로이 소설을 읽으며 지낼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여 재치있고 정서와 감정이 발달한 처녀가 되었다. ...
... 이 작품은 이 처녀와 심생과 신분적인 갈등이 빚어낸 비련(悲戀)을 그린 것이다. 작중 심생은 서울의 양반, 곧 고귀한
신분을 타고 났다. 심생은 이 처녀에게 강렬한 애정을 느끼고 사랑을 획득하기 위해서 오로지 일심 전력 노력한 나머지에 두 남녀의
결합이 일단 이루어지긴 했다. 그러나 양반과 중인이라는 신분적인 갈등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심생이 처녀의 유서(遺書)를 받은 뒤 붓을 던지고 무변(武弁)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 충격 때문에 무한히 고민하다가
학업을 중단하고 문과(文科)는 안 되어서 마지 못해 무변으로나마 나가본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그러나 마침내 그 고민 끝에 죽고
말았던 것이다. 곧 심생의 죽음은 한 여성에 대한 사랑 때문에 끝끝내 현실에 순응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 沈 生 > 全 文
심생(沈生)은 서울의 양반이다. 그는 약관(弱冠)에 용모가 매우 준수하고 풍정(風情)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어느날 그가 운종가(雲從街 : 지금의 종로. 당시 서울의 중심가)에서 임금의 거둥을 구경하고 돌아오던 길에 어떤 건장한 계집종이
자주빛 명주 보자기로 한 여자를 덮어씌워 업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 뒤를 한 계집애가 붉은 비단신을 들고 따라가고 있었다.
심생은 겉으로 그 몸뚱이를 겨냥해보고 어린애가 아닌 줄 짐작한 것이다.
그는 바짝 따라붙었다. 그 뒤꽁무니를 밟다가 더러 소매로 스치고 지나가 보기도 하면서 계속 눈을 보자기에서 떼놓지 않았다.
소광통교(小廣通橋)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개바람이 앞에서 일어나 자주 보자기가 반쯤 걷히었다. 보니 과연 한 처녀라.
봉숭아빛 뺨에 버들잎 눈섭, 초록 저고리에 다홍 치마, 연지와 분으로 가장 곱게 화장을 하였다. 얼핏 보아서도 절대 가인임을 알
수 있었다. 처녀 역시 보자기 안에서 어렴풋이 미소년이 쪽빛 옷에 초립을 쓰고 왼편이나 오른편에 붙어서 따라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마침 추파(秋波)를 들어 보자기 사이로 주시하든 참이었다.
보자기가 걷히는 순간에 버들 눈, 별 눈동자의 네 눈이 서로 부딪쳤다. 놀랍고 또 부끄러웠다.
처녀는 보자기를 걷잡아 다시 덮어쓰고 가버리었다. 심생은 어찌 이를 놓칠 것인가. 바로 뒤좇아서 소공주동(小公主洞 : 지금의 소공동) 홍살문 안에 당도하자 처녀는 한 중문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머엉하니 무언가 잃어버린 것처럼 한참을 방황했다. 그러다가 어떤 이웃 할멈을 붙들고 자세히 물어보았다. 호조(戶曹)에서
계사(計士 : 호조에 속한 회계원. 의관 · 역관과 함께 중인 출신들의 기술직)로 있다가 은퇴한 집이고, 다만 16,7세 된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직 혼사를 정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딸이 거처하는 곳을 물었더니 할멈은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조그만 네거리를 돌아서면 회칠한 담장이 나오고, 담장 안의 한 골방에 바로 그 처자가 거처하고 있지요."
그는 이 말을 듣고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 저녁에 집안식구에게 거짓말을 꾸며대었다.
"동창 아무가 저와 밤을 같이 지내자고 하는군요. 오늘 저녁에 가볼까 합니다."
그는 행인이 끊어지기를 기다려 그 집 담을 넘어 들어갔다. 그 때 초승달이 으스름한데 창 밖으로 꽃나무가 썩 아담하게 가꾸어졌고, 등불이 창호지에 비치어 아주 환했다. 심생은 처마 밑 바깥벽에 기대 앉아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이 방안에 두 매향(梅香 : 몸종을 가리키는 말)과 함께 그 처녀가 있었다. 궐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언문 소설을 읽는데 꾀꼬리 새끼 울음같이 낭랑한 목청이었다.
삼경 쯤에, 계집애는 벌써 깊이 잠들었고, 궐녀는 그제야 등불을 끄고 취침하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뒤척 무언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심생은 잠이 올 리가 없거니와 또한 바스락 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그대로 새벽 종이 울릴 때까지 있다가 도로 담을 넘어 나왔다.
그 뒤로는 이것이 일과가 되었다. 저물어서 갔다가 새벽이면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20일 동안 계속하였으나, 그래도 그는
게을리 아니하였다. 궐녀는 초저녁에는 소설책을 읽기도 하고 바느질을 하기도 하다가 밤중에 이르러 불이 꺼지는데, 이내 잠이
들기도 하고 더러 번민으로 잠을 못이루기도 하는 것이었다. 6,7일이 지나자 문득 '몸이 편치 못하다'고 겨우 초경(初更)부터
베개에 엎드려 자주 손으로 벽을 두드리며 긴 한숨 짧은 탄식을 내쉬어 숨결이 창밖까지 들리었다. 하루 저녁 하루 저녁 갈수록
더해만 갔다.
스무날 째 되는 밤이었다. 궐녀가 갑자기 마루로부터 내려와 바깥벽을 돌아 심생이 앉아 있는 처소에 당도하였다. 심생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불끈 일어서 궐녀를 붙잡았다. 궐녀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도련님은 소광통교 변에서 만난 분이 아니세요? 저는 이미 스무날 전부터 도련님이 다니시는 줄 알았답니다. 저를 붙들지 마셔요.
한번 소리를 내면 다시는 여기서 못나갑니다. 절 놓아주시면 제가 뒷문을 열고 방으로 드시게 할께요. 얼른 놓으셔요."
심생은 곧이 듣고 물러서서 기다렸다. 궐녀는 홱 돌아서 들어가 버렸다. 방에 들어가서는 계집애를 부르더니,
"너 엄마한테 가서 큰 주석 자물쇠를 주시라고 하여 갖고 오너라. 밤이 깜깜해서 사람이 겁이 나는구나."
하여, 계집애가 웃방 마루로 건너가서 금방 자물쇠를 들고 왔다. 궐녀는 열어주기로 약속한 뒷문에다 아귀진 쇠꼬챙이를 분명히 꽂고
다시 손으로 자물쇠를 채웠다. 일부러 쇠를 채우는 소리를 찰카닥 내었다. 그리고 곧 등불을 끄고 고요히 잠이 깊이 든 듯하였으나
실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심생은 속임을 당하여 분통이 났다. 한편 생각하면 그나마 만나본 것만도 다행이다 싶었다. 여전히 쇠를 채운 방문 밖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다음날에 또 가고, 다음날에도 갔다. 방에 쇠가 채워져 있어도 조금도 해이해짐이 없이, 비가 오면 유삼(油衫)을 둘러 쓰고
가서 옷이 젖어도 관계하지 않았다. 이렇게 다시 열흘이 지났다. 밤중에 온 집안이 모두 쿨쿨 잠들었고, 궐녀 역시 등불을 끄고
한참이나 있다가 문득 발딱 일어나서 계집애를 불러 얼른 등에 불을 붙이라고 재촉하더니,
"얘 너희들 오늘 밤엔 웃방으로 가서 자라."
한다. 두 매향(梅香)이 방문을 나가자, 궐녀는 벽에 걸린 쇳대를 가지고 자물쇠를 따고 뒷문을 활짝 열었다. 심생을 부른다.
"도련님, 들어오세요."
심생은 얼떨떨하여 자기도 모르게 몸이 벌써 방에 들어와 있었다. 궐녀는 다시 그 문에 쇠를 채우고 심생에게
"도련님, 잠깐 앉아계셔요."
하고는 웃방으로 가서 자기 부모를 모시고 나왔다. 그 부모는 보고 어리둥절하였다. 궐녀는 말을 꺼내었다.
"놀라지 마시고 제 말을 들어보셔요. 제 나이 열일곱으로 발걸음이 일찍이 문밖을 나가지 못하옵다가, 월전에 우연히 임금님의
거둥을 구경하고 돌아오던 길에 소광통교에서 덮어쓴 보자기가 바람에 발려 걷히었습니다. 마침 그 때 한 초립 도령과 얼굴이
마주쳤어요. 그날 밤부터 도련님이 안 오시는 날이 없이 이 방문 밑에 숨어 기다린 지 이제 이미 30일이 지났답니다. 비가 와도
오시고, 추워도 오시고, 문에 쇠를 채워 거절해도 역시 오시었어요.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소문이 밖으로 퍼져서
동네 사람들이 알게 되면 밤에 들어왔다가는 새벽이면 나가는데 자기 홀로 창벽 밖에서 있은 줄을 누가 믿겠습니까. 사실과 다르게
누명을 뒤집어 쓰지요. 제가 필야 개에게 물린 꿩이 되는 셈이예요. 그리고 저분은 양반댁 도령으로 지금 바야흐로 청춘이라 혈기가
아직 정치 못하여 다만 나비와 벌이 꽃을 탐낼 줄만 알고 바람과 이슬에 맞음을 돌보지 않으니 며칠 못가서 병이 나지 않겠습니까.
병들면 필야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렇게 되면 제가 죽이지 않았어도 제가 죽인 셈입니다. 비록 남이 모르더라도 반드시
음보(陰報)가 있게 됩니다. 또 제 몸은 한낱 중인(中人)집 딸에 불과합니다. 제가 무슨 절세의 경성지색(傾城之色)으로 꽃이
부끄러워할 만한 용모를 지닌 것도 아닌데, 도련님께서 솔개를 보고 매로 여기시어 제게 지성을 바치되 이토록 부지런히 하옵십니다.
제가 만일 도련님을 따르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싫어하시어 복을 제게 주시지 않을 거예요. 제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근심하지 마옵소서. 아! 저는 부모님께서 연로하시고 동기간이 없으니 시집가서 데릴사위를 맞아 살아계실 때에 봉양을 다하다가
돌아가신 뒤에 제사를 모시면 제 소망에 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일이 뜻밖에 이렇게 되었으니, 이 역시 하늘이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궐녀의 부모는 어안이 벙벙했으나 달리 할 말이 없었고, 심생 더욱 아무 말도 못했다.
그래서 같이 동침을 하게 되었다. 애타게 사모하던 끝에 그 기쁨이야 오죽하였으리오. 그날 밤 방에 들어간 이후로 저물게 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오지 않는 날이 없었다.
궐녀의 집은 본래 부유했다. 그로부터 심생을 위하여 산뜻한 의복을 정성껏 마련해 주었으나, 그는 집에서 이상하게 여길까 보아서 감히 입지 못하였다.
그러나 심생은 아무리 조심을 하여도 집에서는 그가 바깥에서 자고 오래 돌아오지 않는데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절에
가서 글을 읽으라는 명이 내리었다. 심생은 마음에 몹시 불만이었으나, 집의 압력을 받고 또 친구들에게 이끌리어 책을 싸들고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올라갔다.
선방(禪房)에 머문 지 근 한 달 가까이 되었다. 심생에게 궐녀의 언문(諺文) 편지를 전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편지를 펴보니 유서(遺書)로 영영 이별하는 내용이 아닌가. 궐녀는 이미 죽은 것이다.
그 편지의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봄추위가 아직도 쌀쌀하온데 절간의 글공부에 옥체 평안하시옵니까. 항상 사모하옵는 바 어느날이라 잊으리까.
소녀는 도련님께옵서 떠나신 이후로 우연히 한 병을 얻어 점점 골수에 사무쳐 백약이 무효하온지라 이제 필경 죽음밖에 없는 줄
알았사옵니다. 소녀처럼 박명한 몸이 살아본들 무엇하로리까만은, 우선 세 가지 큰 한(恨)을 가슴에 안고 있으니 죽음에 당해서도
눈을 감지 못하옵니다.
소녀 본래 무남 독녀로 부모님의 사랑하옵심을 받자와 장차 부모님께서는 적당한 사위를 구하여 만년(晩年)의 의지를 삼고 후일의
계책을 마련코자 하였더니, 호사 다마라 뜻밖에 악연(惡緣)에 얽히었군요. 여라(女蘿 : 넝쿨진 풀의 일종. 지체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결탁하는 것을 말함.)가 외람되게 높은 소나무에 붙었으나 주진지계(朱陳之計 : 주·진 양씨가 秦의 惡政을 피해
무릉도원에 들어가 서로 혼인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혼인함을 가리키는 말)가 이제 단망(斷望)이옵니다. 이는 소녀가 아무
낙이 없이 시름하다가 마침내 병으로 죽음에 이른 까닭이옵고, 이제 고당학발(高堂鶴髮 : 늙으신 부모님을 가리키는 말)은 영원히
의뢰할 곳이 없게 되었사오니, 이것이 첫째 한이옵니다.
여자가 출가하면 비록 종년이라도 문에 기대어 손님을 맞는 기생의 몸이 아닌 다음에야 남편이 있고 또 시부모가 있겠지요. 세상에
시부모가 모르는 며느리가 있사오리까. 소녀 같은 몸은 남의 속임을 받아 몇 달이 지나도록 일찍이 도련님 댁의 늙은 여자 하인
하나도 보지 못하였사오니, 살아서 부정한 자취를 남겼고, 죽어서 돌아갈 곳 없는 귀신이 될 것이라 이것이 둘째 한이옵니다.
부인이 남편을 섬기매 음식을 장만하여 공궤하고 의복을 지어서 입으시도록 하는 일보다 큰 일이 있을까요. 도련님과 상봉한 이후
세월이 오래지 않음도 아니요, 지어드린 의복이 적다고 할 수도 없는데, 한 번도 도련님에게 한 사발 밤도 집에서 자시게
못하였고, 한 벌 옷도 입혀드리지 못하였으며, 도련님을 모시기를 다만 침석(枕席)에서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셋째 한이옵니다.
그리고 상봉하온 지 얼마 아니되어 문득 길이 이별하옵고, 병으로 누워 죽음이 다가왔으나 대면하와 영결을 못하옵니다. 이러한
여자의 슬픔을 어찌 족히 군가에게 말씀드리오리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러 창자가 이미 끊어지고 뼈가 녹으려하옵니다. 비록 연약한
풀이 바람에 쓰러지고 시들은 꽃잎이 진흙이 된다 하온들 끝없는 이 원한은 어느날이라 다하리오.
오호(嗚呼)라! 창 사이의 밀회(密會)는 이제 그만입니다. 바라옵건대 도련님은 소녀를 염두에 두시지 마옵시고, 더욱 글공부에 힘쓰시어 일찍이 청운(靑雲)의 뜻을 이루옵소서.
옥체를 내내 보중하옵기 천만 비옵니다.」
심생은 이 편지를 받고 자기도 모르게 울음과 눈물을 쏟았다. 이제 비록 슬프게 울어보나 무엇하겠는가.
그 뒤에 심생은 붓을 던지고 무변(武弁)이 되어 벼슬이 금오랑(金吾郞 : 義禁府의 郞官)에 이르렀으나 역시 일찍 죽고 말았다.
매화외사(梅花外史 : 작자인 李 鈺의 별호) 가로되, 내가 열두 살 때에 시골 서당에서 글을 읽는데 매일 동접들과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였다. 어느날 선생이 심생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주시고,
"심생은 나의 소년시 동창이다. 그가 절에서 편지를 받고 통곡할 때에 나도 보았더니라.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듣고 지금까지 잊지 않았구나."
하시고, 이어서
"내가 너희들에게 이 풍류 소년(風流少年)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일에 당해서 진실로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뜻을 세우면 규중의 처자라도 오히려 감동시킬 수 있거늘, 하물며 문장이나 과거야 왜 안 되겠느냐."
하시었다.
우리들은 그 당시 듣고 매우 새로운 이야기로 느끼었다. 뒤에 정사(情史 : 인정과 남녀 연정에 관한 것을 기록한 이야기책)를 읽어보니 이와 비슷한 이야기도 많았다. 이에 이를 추기(追記)하여 정사의 보유(補遺)를 삼을까 한다.
프린지 페스티벌의 다른 작품들처럼 이 작품도 이미 공연되었던 적이 있는 작품을 다시 소극장 무대에 세운 것이다.
고작 3일을 무대에 올려, 100명 남짓한 관객을 위해, 이 모든 것을 다시 연습하고, 새로운 사람을 오디션한다니,,,
연극이란 참 열정의 산물이고, 점점 헤어날 수가 없다.
포스터도 그 때의 포스터를 가져왔다.
연극을 딱 다 보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은 참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키보드 앞에 앉으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일단 극단에서 배부되는 팜플릿에 적혀있는 내용을 옮긴다면,,
->우연히 조선시대 문인이었던 '이옥'이라는 작가의 글들을 접함->정조대왕의 '문체반정'정책에 관심.
->당시의 남인/노론의 정치적인 대립을 잠재우기 위해 정조대왕이 내세운 '문체반정'정책은 다름 아닌 왕권강화를 위한 일방적인 정책은 아니었을까 하는 질문을 낳았다.
->나아가 70-80년대 금지곡들의 자유도 노래코자 했다.
그리고, 스토리를 발췌해오자면, 주인공 남공철이 아버지가 태워버리라고 한 책을 호기심에 읽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책은 당시 정조의 문체반정에
따라 금지됐던 소설문체로 쓰인 책이다. 남공철은 유생들에게 그 책의 내용을 알려주기 시작한다. 유생들에게 그 책이 읽혀지고
있다는 것을 안 정조는 그 책을 쓴 자를 찾아내 벌을 주려 한다. 그러나 그 책은 정조의 마음까지 사로잡는다.(시사저널21발췌)
그리고, 다음은 그냥 내 자투리 감탄들.
1.두 개의 공간과 시간이 하나의 무대의 하나의 부분에 겹쳐져 인물마저 섞여있는데도 그게 자연스럽고 헷갈리지 않으며, 인물끼리 알아차리지 못한다.
2.아 북소리 레알 사랑스러움. 두두두두두두두 할때.
3.출입경로가 3개인 것도 좋았다. 계단도 좋았고, 관객의 코앞으로 쏙 빠져나가는 것도 좋았다.
4.의자는 참 연극마다 유용한 소품인 것 같다. 연극의 고전적 소품이겠지. 여기서의 의자는 (내 해석이 옳으리란 법은 없지만) 욕망이자 지위이자,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선뜻 건낼 수 있는 무언가의 권력의 상징이다. 또한 자존심이기도 하고.
5.신문지로 더덕더덕한 바닥을 보고, 퍼블릭아이처럼 안과 밖을 구분짓는 경계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른 소극장보다 기둥도 없고 경계가 불분명하고 깊이? 세로길이? 가 깊은 그 곳에 진행경로를 만들고, 또, 건물 안팎을 나타내기도 했고.
6.신문지로 만든 의상은 정말,,, 으악 소리가 나올만큼 좋았다. 그냥 내가 문외한이라서 이걸 기발하다고 느끼는 걸 수도 있다.
그런데, 왕에게 신문지로 만든 의상을 입혀주는 순간까지의 그 모든 전개에서, 그렇게까지 빛을 발하는 소품이 또 있을 수 있을까.
7.이건 좀 초콜릿코스모스라는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라고 생각했는데, 모든 내용에서 독립된 '연극도구'의 소녀가 한 명 등장한다. 처음에는 소설 중 내용에서만 나오더니, 후에는 계속 빼꼼히 맴돌며 슬퍼한다. 연극을 볼 때는 그 소녀가 '연극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이거 초콜릿코스모스를 보고 쓴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그 소녀가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계속해서 기뻐하고 명랑하지만, 보통 그녀는 숨고, 맴돌고, 거절당한다. 글쎄, 내 망상이다 이건 ㅋㅋㅋㅋ 나도안다ㅋ 근데 너무 헤맑고, 예쁘고, 선명하고, 눈에 튀었다. 허리가 올곧아 그런지 어느 구석에 있어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냥 반했다ㅋㅋㅋㅋㅋ
8.왕이 독자의 주체가 되고, 그 시점에서 심생에 감정이입하는 걸, 연극적으로 너무 잘 표현했다. 그래, 그냥 주인공이 되면 되는 거다. 극 중 주인공이 소설 속 주인공도 되고, 이 얼마나 편리한가.
9.같이 본 모두가 반론을 제기했다면, 실제로 그 '정조가 작가'설은 억지여도 너무 억지였던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도 난 헤벌레ㅋㅋㅋㅋㅋ 정조의 세자시절을 연기한 소녀의 모습도 너무 '세자'다웠고, 그리고 세자가 정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책'을 넘겨주는 것에서 목에 맨 밧줄을 넘겨주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치환되는 그 장면에서... 아 레알 할말잃음... 뭐... 이걸 누가 어떻게 쓴겈ㅋㅋㅋㅋㅋ
10.유머욕심도 있어서 현대적인 것들을 지나치지 않을만큼 열심히 넣었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좀 늘어지면서 유머가 사라지긴 했지만, 책이 등이라는 설정과, 그 등을 이고 나가게 해서, 등이 죽음을 암시하게 하는 것까지.
참 칭찬도 이렇게 구체적으로 해야 속이 시원한 걸 보면,
천상 문과인건가ㅋㅋㅋ
너무 좋았다.
참쌀떠어어어~억! 과 어울리는 아메리카노~~~ 의 발성에도 반했다 ㅋㅋㅋㅋㅋ
10년째 찹쌀떡을 판 것도 아니고 목소리는 왜 그렇게 뚜렷하고 선명하고 좋니.
그냥 남는 아주 사소하고 작은 아쉬움은,
하나, 그 엎드려 절하던 아빠는 목매달려 죽었는데, 그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둘, 자기가 그 글을 쓴 거라고 상기하게 되는 계기가 좀 어정쩡했던 것 같다. 왕이 좀ㅋㅋㅋㅋ
셋, 원래 소설의 본문에 충실하려고 했던 것 같긴 한데, 여자가 죽었다는 걸 나타내는 장면은 너무 좀 산만했던 것 같다.
저기선 왕인지 심생인지가 읊조리고 여기선 그녀가 읊조리고 저기선 흐느끼는 무리가 나가고.
아 몰라 다 좋았다ㅋㅋㅋ
의자에 앉아서 자는 연기까지 혼이 나갈만큼 좋았다ㅋㅋㅋ
프린지페스티벌 만세!!!!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보는 두 번째 연극이다.
<사랑이 올까요>
음악극이라기에 어떤 형태일지 기대가 컸다.
사실 거의 모든 글이 그렇지 않을까 싶지만,
이러이러한 설정은 재밌겠다는 한 장면에 대한 착상에서 출발하잖아.
그런데 그 한 장면을 죽 잡아당겨 한시간 분량으로 만들면 보는 입장에서 좀 곤란하다 ㅋㅋㅋ
이 연극은 그런 느낌이었다.
음악 자체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한데,
피아노 반주는 그나마 나았지만, 기타 반주는 목소리가 묻혀서 가사를 못알아들었을 뿐이고.
드라마는 한 장면 한 장면의 호흡이 빨라도 따라가기 쉽고,
소설도 흐름이 끊기긴 하지만 그럴 수 있을 테지만,
연극에 그렇게 불을 껐다 켰다 하는 건 좀 에러일지도.
순서를 좀 더 차분히 전개해도 괜찮았을 텐데, 아쉽다.
세 분다 연기는 좋았고, 지석역 분의 목소리는 잘 울려서 좋았다.
이렇게 포스터 보면서 빵빵 터져도 괜찮은 걸까 싶을 정도로 빵빵 ㅋㅋㅋㅋ
"그렇게 자신이 없나?"와 "그 사람이... 나라고요?"는 대사를 바꿔서 잘못 인쇄한 것 같다 ㅋㅋㅋㅋ
근데 아직도 왜 저 둘이 이름이 다른건지 모르겠을 뿐이고 ㅋㅋㅋㅋ
세상엔 닮은 사람이 셋 있다더니 설마 둘은 타인이라는 설정인갘ㅋㅋㅋㅋㅋ
근데 여자의 눈엔 '이다'가 안보였잖아 ㅋㅋㅋㅋㅋ 과거의 인물인거잖앜ㅋㅋㅋㅋㅋㅋ왜 근데 이름이 다름요ㅋㅋㅋㅋㅋㅋㅋ
좀 여럿의 설정을 한 군데 모아놓은 것 같은 느낌.. 한 사람이 쓴 거라면 정말 묘한거다ㅋㅋㅋㅋㅋㅋㅋ
그리 나쁘진 않았던 것 같은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을 수가 없다.
소극장이 너무 구석에 처박혀 있고 입간판도 없어서, 찾느라 고생했다.
다시 내려가다가 찾느라 고생하는 중인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느라 잘난척한 건 자랑. 그러다가 택시에 치일뻔한건 안자랑.
연극은 검색을 해서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 때 그 때 감상을 남겨야지. 하고 생각한다.
요즘, 주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꼭 그렇게 거창한 이야기만 할 필욘 없다는 걸 느끼게 해준 연극이었다.
처음엔 좀 뜬금없다고 생각했던, 외침.
어른들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고, 꽃이 시들었으니 물을 주어야 겠고, 이런 한 분의 대사는 기억이 안난다ㅋㅋㅋ
어쨋든 그 대사들의 활용이 너무 좋았고,
같은 장면의 재활용도 너무 좋았고,
시간 순서가 바뀌는 것도 흐름이 뚝뚝 끊기지 않았고,
칠판을 활용해서 대놓고 적어주는 것도, 정말 똑똑했다.
사진들은 지금의 축제 참여 때의 포스터가 아니라, 옛날 퍼블릭 아이 3월 공연때의 포스터와 사진들을 가져온 것이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거슬리도록 들렸으니, 이번의 사진도 뒤져보면 찾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문제가 제기되고, 고조되고, 해결법이 제시되는 그 정석적인 구조가 있어서 너무 좋았다.
흐지부지하게 흐리지 않고 부딪히는 것도 좋았고, 세 분 다 연기가 너무 쩔었다 ㅋㅋㅋㅋㅋ
대화의 단절은 침묵으로,
반어적이지만 작가가 찾아낸 해답을 향해 가는 거라면, 어떤 답이든 좋다.
와우북축제 때부터 생각한건데,
예전엔 뭔가 축제 같은 걸 해도 이걸 도대체 왜한건가 싶을 정도로 기획의도 불분명+참가단체 불분명+참가욕구 뇨뇨 였는데,,
요즘엔 좀 후원도 후원답게 하고, 개최측도 참여측도 관람측도 확실히 이익을 취할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머리를 쓸 줄 안다.
으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