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메뷔란 단어는 내겐 낯선데, 과연 남들에게도 낯설까.


-------------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뿌연 수증기 속에서 낡은 결심이 날을 세웠다. 헤어지자.
거울을 본다.
언제 이렇게 확고한 이목구비가 생기고, 눈 아래가 짙어지고, 입이 앙다물어지게 되었을까. 고등학교 때의, 자기고집과 비대한 자아에 시달리는 그, 입을 헤- 벌린 채로 앞을, 칠판을, TV를 바라보던 그 얼굴은 어디로 간 걸까.
머리를 대강 쭉 짜서 물기를 털고 욕실을 나섰다. 어디서 타다다닥 발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같이 산지가 언젠데 아직도 내가 크게 움직이면 꼬리가 빠지게 화다다닥 고양이는 저만치 도망가서 서랍장 아래에 숨는다.  
부재중 전화가 두 통 와 있다.
수건으로 머리를 둘둘 말고 유태인이 되어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루- 고전적인 신호음이 대여섯번,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의 '여보세요-.;
전화를 걸긴 내가 걸어놓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오늘도 많이 피곤했냐는 둥, 저녁은 먹었냐는둥, 부지런히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 순순하게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이렇게 온 몸으로 웅변하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조금의 감동도 받지 못하는 내가, 과연 오롯하게 정상일까. 
어느새 수건이 느슨해졌는지 어깨에 물이 떨어진다.
'이제 그만하자.'
그래, 어딘가의 회로가 크게 설계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상처받은 얼굴을 통해서만, 아, 내가 정말로 사랑받고 있었구나, 하는 걸 확인하고, 안도하게 된다. 이건 어쩌면 습관이다.
대답이 없다.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냥 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까지 한참을 말이없다가, 그가 나를 불러세웠다.
'그거 혹시...'
잠깐을 또 망설이더니, 조용하게,
'그 남자 때문이야?'
그 남자? 무슨 쓸모없는 오해라도 한 걸까. 
'무슨 소리야?'
'그 남자한테 돌아가는 거잖아. 사실... 다 알면서도 내가 억지로 붙잡아 둔거야. 그래,... 그럼 가 봐.'
조금 비장하게, 그래서, 조금 웃기게.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가 말하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짐작가는 바라곤 전혀 없었다.  
'무슨...'
'그래, 그 남자랑 있을 때 넌 참 행복해 보였지. 잘 지내라.'
상처받은 목소리, 하지만 안도하기보다 불안해졌다.
무슨 소리- 뚝. 끊어진 전화를 다시 걸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또 훌쩍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고, 다시 주말이 되돌아왔다. 다이어리를 폈다. 늦게 술약속이 하나 있는 걸 빼면 하루종일 간만에 아무 일도 없었다. 온 몸에 힘을 빼고 털썩 몸을 던져 누웠다가, 일주일 전에 헤어진 남자가 붙여준 천장의 야광별에 시선을 붙들렸다.
그 남자?
누구를 말하는 걸까.
문득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내겐 생경한 이름도 꽤 많았다. 그래서 늘 이름 뒤에 수식어를 붙여 폴더에 분류를 한다. -우유아줌마 같이 알기 쉬운.
가족, 직장, 과거 아르바이트의 지인들, 중학교, 고등학교의 지인들, 초등학교 폴더도 따로 있다, 그리고 기타 폴더를 열었다.
그냥 분류하기 애매한 사람들의 집합이다.

스크롤을 죽 내리다가 '최재현-보고싶다'를 찾았다.
보고싶다. 
보고싶다.
보고싶다.
절대 내가 저장할 리 없는 수식어. 입에 익숙하지 않은 이름. 소름이 쫙 돋았다. 뭐야, 내가 술김에 뭘 잘못 저장했나.

대화문자목록으로 들어갔다. 텅 비어있었는데 문자보관함에 저장된 문자가 5개 있었다.
'수연아, 보고싶다. 내일 포도길 앞에서 3시! 지각하면 주거써.'
'수연아, 보고싶다. 내일 포도길 앞에서 1시! 너 한번만 더 늦어봐.'
'수연아, 사랑한다. 내일 포도길 벤치에서 봐.'
'수연아, 보고싶다. 오늘 저녁 포도길 9시!'
'야, 최재현, 지금 어디야, 나 지금 포도길인데.'

뭐야. 내 이름은 수연이가 맞다. 문자에 찍혀있는 날짜는 고작해야 9달 남짓 전이다.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까. 정말 그럴까.
섬칫해서 폰을 꺼버리고 책상 서랍의 일기장을 꺼냈다.

2010년, 작년의 일기장을 펼쳤다.  



일기장은 책등이 너덜거리도록 절반 넘는 페이지가 뜯겨나가고 없었다.

섬뜩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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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다고 말했다. 저도 지친다고, 이젠 힘들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랜 시간을 망설인 것처럼, 이 시간도 아주 오래고 더딜 거라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대답을 하고, 계산을 하고, 언제나처럼 팔짱을 끼고, 문턱까지 나서는 길이 얼마나 짧은지 묘사할 단어를 찾을 시간도 없었다.

몇 번이고 나는 뒤를 돌아봤고, 그 때마다 뒤를 돌아 이 쪽을 보고 있는 그 사람이 있었다.
그게 늘 좋았다.
말하지 않아도, 눈치가 없어도, 내가 손을 내밀때 같이 내밀고, 내가 돌아볼 때 같이 돌아보는 게. 내가 배고플 때 같이 허기지다고 했고, 내가 입맞춰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그도 그렇게 생각했다. 재고 따지고 눈치보지 않아도 되서 좋았다.
그런데 그게 오늘에 와서는 불편해졌다.
말하지 않아도, 눈치 없는 그와 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서. 어느날 그는 힘들어했고, 나도 그랬다. 어느날 그는 슬프다고 말했고, 나도 그랬다. 어느날 그는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나도 그랬다. 그런데 한 달째 어쩔까 하고 고민하던 생각의 끝이 이 곳으로 걸음을 옮기게 했을 때, 그도 그랬던 거다.

나와 내가 연애를 할 수는 없다는 걸 좀 더 일찍 알아차렸어야 했다.
이제 남은 후회와 외로움과 그리움은 다 어쩔 것인가.

눈이 아파서 부비다가, 티끌이 들어갔는지 눈물이 나왔다. 
한 두 방울이 아니었다. 일그러지도록 펑펑 울었다.
울다 지쳐서 침대에 온 몸을 내동댕이 치고 막 잠들려는 그 순간, 그도 울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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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살은 언제나 순위가 높다.
자살의 앞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은 고작해야 서너 가지로, 기껏해야 심장질환과 암, 뇌혈관질환이다. 

죽는 사람들의 명수를 놓고 다른 나라와 비교하는 게 과연 유의미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OECD평균의 세 배로, 자살률만 놓고 보면 1위다.
어쨋든 적진 않단 소리다.

하루에 약 43명이 자살을 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1시간에 약 두 명이 자살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내 삼촌의 자살도 그리 놀라울 것 없는 일이어야 할텐데,
그 날의 3일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며, 난 며칠째 웅얼거리고만 있다. 


2.
나는 슬프지 않았다. 슬플 수가 없었다. 바람이 잔뜩 든 무와 새파란 땡감을 외숙모가 내 입에 쳐 밀어넣은 것처럼, 뭐라 말할 수 없는 비릿하고 떫고 매운 맛이 입을 가득채워, 뭐라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수화기를 멍하니 들고 서 있었다. 갖은 감정이 다 속을 뒤집어 놓았지만 슬프지만은 않았다.

수화기를 그대로 든 채로 오열했다. 화를 냈다. 

이건 너무 비겁했다.


3.
세상에는 세탁기가 절로 돌아가, 저절로 빨래가 건조되어, 서랍에 차곡차곡 오므려 들어가고, 옷장에 반듯반듯 줄을 서 있는 줄 아는 사람이 있다. 나의 하나뿐인 외삼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TV에 나오는 정치인들의 지키지 못할 공천과, 지역주의에의 부추김과,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대해서는 몇 시간이고 떠들어 대는 사람이 내 삼촌이었다. 간혹 인터넷 신문이나 가판대 신문을 흘깃 보기라도 하면 우리나라의 언론의 무책임함과 선정성에 대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나를 앉혀놓고 분노를 터트릴 줄도 알았다. 또, 북한의 권력 이양 문제와, 연평도 폭격, 그리고 일본의 대규모 지진 이야기를 볼 때 마다 이 시대에도 언론통제가 남아있다고 내게 한 마디의 대꾸도 용납치 않는 태도로 설명할 줄도 알았다.

간혹 내가 저지르는 그에 대한, 어른에 대한 공손치 못한 태도나 행동, 그리고 제 누이되는 내 엄마에 대한 나의 소홀함에 대해서도 나긋한 어조로 조목조목 예시를 들어 나무랄 줄 알았다. 그리고 또다시 앞서 열거한 그 모든 것에 대한 나의 무지함과 무관심에 대해서도 비난과 무책임함을 물을 줄 알았다.

나는 운동권이 아니었으며, 시위가 매일같이 있었던 그 세대의 문제의식들을 죄 이해할 순 없었다. 하루에 뉴스를 보는 시간을 다 합쳐도 10분 남짓, 인터넷 기사를 클릭, 클릭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삼촌의 그런 비난과 분노들을 매일 보고 있자면,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이해할 순 없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삼촌의 눈을 희번떡거리게 하는 크고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으려니 생각했다. 

허나,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제 몸뚱이 하나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해, 온 집을 난장판으로 어질러 놓고, 부엌에 발 한 번 디뎌 본 적 없는 삼촌은 내겐 버거운 짐이었다. 엄마에겐 소중한 동생이었고, '네가 좀 잘 해 줘, 니네 삼촌이 니가 어릴 때 얼마나 널 예뻐했는데, 너 그러면 못쓴다.'는 엄마의 소리를 하루에도 열 두 번 더 들어가며 살아있는 시체의 수발을 들었다. 

그는 돈을 쓰는 건 할 줄 아는 주제에, 신세 진 걸 갚는다느니 하며 돈 쓰는 데는 궁색하지 않은 주제에, 돈 한 푼 없는 줄 이미 알고 있는 내게까지 푼돈이나마 꼬박꼬박 용돈을 쥐어줘야 마음이 편한 주제에, 절대 돈을 벌어야만 한다는 강박을 가질 줄 몰랐다. 절대 그 생활은 풍족하지 않았다.

대학교 1학년때 대학을 서울로 와서부터 4년을 외삼촌의 뒤치닥거리를 하면서 보냈다. 처음엔 가끔 밖에서 자고 오거나, MT를 다녀오면 음식을 해 먹은 흔적이라도 남아 있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삼촌은 그 모든 일에서 손을 떼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기숙사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을 땐 삼촌은 차려준 밥도 먹지 않고 하루 종일 내내 물만 벌컥벌컥 들이키는 걸로 시위를 대신했다. 또 다시 엄마의 '그러면 못 쓴다'운운하는 소리에 하는 수 없이 벌려놓은 짐을 일주일만에 다시 꾸려 삼촌의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사이에 내 속엔 하루종일 부대끼는 이 사람에 대한 불편함이 자라났다. 솔직하게 인정하자. 그건, 증오였다. 권위적이고 제 시대에 파묻혀 살 줄 밖에 모르는 진보적이고 문제의식에 사로잡힌 인간에 대한. 늘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구는. 내 엄마의 동생에 대한. 어쩜 사지가 말짱한 사람치고, 그는 내 엄마에게도, 우리 모두에게 짐이었다. 그래, 존재 자체가 민폐라는 가호한 말을 그에게 써도 좋을 거라고 여러번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혼한 지 오래인 외숙모는 내내 나의 인내심에 감탄하는 시선을 보내며, 간간히 들려 밑반찬을 도와 주거나, 전화로 안부를 묻곤 했다. 하지만 대학 4년이 지나고, 부러 직장을 핑계로 다른 지방으로 도망쳐버린 뒤로 외숙모의 목소리를 듣는 건 지금이 2년 만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슬플 수가 없었다.


4.
처음 서울에 올라갔을 땐, 수능을 마치고 할 일도 없이 매일을 보내는 나와, 내가 없으면 밥도 먹지 않는 외삼촌이 20평의 좁은 집에서 하루종일 등을 맞대고 앉아 무언가의 활자를 읽거나 쓰곤 했다. 주로 내가 읽는 쪽이었다.

그 맘때의 삼촌은 정열적으로 활자를 토해내는 작가였다. 수필도 썼고, 일기도 썼고, 소설도 썼고, 한 번도 상영되거나 발표된 적은 없지만 희곡도 여럿 썼다. 나는 삼촌의 유일한 독자이자 유일한 비평가였다. 

처음엔 삼촌의 집에서 산다는 게 불편했지만, 삼촌의 글을 읽는 내내 점점 마음이 편안해졌다. 삼촌은 많이 아는 사람이었고, 글 속에는 다정함과 세상을 향한 외로움과 비난이 듬뿍 녹아있었고, 그것들은 내게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삼촌이 조금만 더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5.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아, 내일 신문에 틀림없이 삼촌의 얼굴이 실리겠구나. 1인 가구소득이 얼마로 성장한 이 나라에서의 아사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내용일테지. 다른 그 어떤 죽음도 신문에 실리기엔 이젠 너무 흔하지만, 이거라면 틀림없겠구나, 하고.

화장을 하는 건 내일이라고 했다. 가능하다면 오늘 올라와줬으면 좋겠다고, 엄마도 방금 연락을 받자마자 채비를 해서 서울로 가고 있을 거라고 했다. 대답을 망설이는데, 외숙모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네 앞으로 외삼촌이 남긴 물건이 많더라고. 올 때 차를 가지고 오는 편이 좋을 거라고.

외삼촌의 황량한 집을 떠올렸다. 그 텅 빈 계좌도 떠올렸다. 내가 살고 있을 때도, 늘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집 같았었는데.
 

6.
강화도의 끝자락에서 차를 몰아,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도와 서울의 경계를 넘었고, 교통사정이 열악한 퇴근길의 차로에 끼어들었다. 
조급증 나지는 않았다.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외숙모도 황망한 정신에 나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아직 가을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해가 저까지 뉘엇거리고 있었다. 아등바등거리며 어느 빌딩 꼭대기에 목을 걸치고 있었다. 붉고 노랗고 어딘가 보랏빛이 보였다. 말도 안된다. 어떻게 겨울이 이렇게 쉽게 온단 말인가. 그러면 쉽게 내년이 올 테고, 그러면 나는 쉽게 20대의 마지막 나이가 된다.

외숙모의 목소리가 계속 귀에 맴돌았다. '어제서야 겨우 발견됐다고- 경찰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게 말이다- 훈아, 널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아. 그게- 아사라고... 자세한 건 더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아사라고,,, 널 원망하는 건 아니다, 정아.' 

오늘 같이 날을 보내고, 내일 새벽 해가 밝는데로 화장을 하고, 그렇게 보내고 나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면, 직장일에 방해되지 않게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좀처럼 입지 않는 까만 정장에 까만 스타킹이 여기저기 불편하고 죄었다. 


7.
막상 도착하고 보니 외삼촌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외삼촌의 501호 방문을 여는 데는 오랜 망설임이 필요했다. 발인마저 끝났으니 여기에 아무도 없으리란 건 자명했지만, 막 죽은 사람이 풍기는 냄새가 구석구석 스며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본 중 가장 기묘한 방이 거기 있었다.
이 방에 아사한 사람의 시체가 누워있었다니, 누워있을 자리를 찾느라 고생했을지도 모르겠다. 압사가 훨씬 어울렸다.

문을 열자부터 발치에 신문뭉치가 차였다. 큰 박스 두 개가 가득 잘린 신문조각으로 채워져 있었다. 성한 신문들은 바닥에 접혀 뉘어 있었다. 그리고 외숙모가 말한 데로 차가 없으면 옮길 엄두도 안 날 만큼의 커다란 상자 다섯이 밀봉되어 있었다. 그 위엔 매직으로 또박히 내 이름 석 자, 귀하라고 적혀있었다.

외삼촌에게 배운 나쁜 습관 중 하나,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어딘가에서 곰팡내 같은 것이 풍겨왔다. 담배의 새까만 냄새가 맡고 싶었다. 베란다로 나갔다.

외삼촌은 선선한 공기 속에 빌라 501호 방에서 혼자 조용히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고 했다. 최초로 발견한 건 출판사 직원이라고. 원고 마감 일자를 안 지키는 거야 늘상 있던 일이지만, 도통 연락이 안되서 찾아갔었다고. 정말 까무라칠 만큼 놀랐다고. 침대에 너무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고. 냄새는 좀 지독했노라고. 

병원에서 알려준 대강의 사망추정시간은 이틀하고도 반나절 전이었다. 그 시간동안 문이 열려있는 집에 홀로 누워 있는데도,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거다.

"아사..."

처음엔 외삼촌은 나에게 담배를 강권했다. 알고서 피지 않는 건 괜찮지만, 무슨 맛인지도 모르면서 안 피는 건 그저 경험의 부족일 뿐이라고 했다. 그 말은 그럴 듯 했고, 담배를 필 때 마다 안도하는 듯한 외삼촌의 표정은 더 그럴듯했다. 

하지만 외삼촌은 늘 그렇듯 절반의 진실만을 말해주었다. 담배가 무슨 맛인지 알고나니 피지 않을 수가 없게 되버렸다. 

어떤 감각일까. 굶어 죽는다는건. 그 말이 주는 비참한 느낌 때문에, 삼촌의 방을 들어 서기가 그렇게 망설여 졌던거다. 아사.

무심코 냉장고에 눈이 갔다. 코드는 제대로 꽃혀 있었다. 문을 열었다. 

상하지 않은 달걀꾸러미와 제철 과일이 조금, 그리고 잡다한 양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정말로 아사일까.

옛날 우화에 나오는 바보 이야기가 생각났다. 너무 게으른 아이가 있었는데, 어찌나 게으른지 입에 넣어주지 않으면 밥을 먹으려 들지 않았다고. 어느날 어머니가 멀리 외출할 일이 있었는데, 너무 걱정된 나머지 아들의 목에 떡을 목걸이로 만들어 걸어주었다고. 그런데 돌아와보니, 그 떡을 먹기조차 너무 귀찮아서, 굶어 죽어 있었노라고.

똑.

또각.

구두굽 울리는 소리가 두 번. 문이 열리는 소리가 한 번. 

뒤를 돌아보자 눈썹을 일자로 하고 슬픔을 그렁거리고 있는 외숙모와, 텅 빈 얼굴을 한 엄마가 있었다. 우리는 셋 다 공범이었다. 서로의 눈을 마주치자 그걸 확신할 수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거기 셋 있었다.


8.



---




사람이 죽으면, 그 짐들은 다 어디로 갈까? 사람이 죽으면, 그가 살던 집은 어떻게 될까? 
외숙모 앞으로 남겨진 이 집을 외숙모는 당장 팔아버리겠다고 했다. 법적으론 이미 아무 관계도 아니었지만, 너무 냉정하게 구는 건 아닐까. 어쨋든 그 집을 정리하는 건 내 몫이었다.
나는 바닥의 신문들을 한 데 모으다 말고, 벌떡 일어나 근처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손에 집히는데로 일회용 카메라를 샀다. 나는 이걸, 이 풍경을, 내가 혼자 보아선 안된다는 어떤 의무감이 생겼던 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시체를 표시하는 테잎 자욱 따위도 없었다. 외숙모도 엄마도 어딜 간건지 방 문이 휑하니 열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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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my Heart.

                           Soko.

You can take my heart for a walk on the beach
You can take my heart for a little trip
You can take my heart very close to your heart
You can take my heart forever if you like

But not every heart belongs to any other
You and I
You and I are meant to be
I'm the one for you, You're the one for me
You love me as much as I do
When you look at me and we're skin to skin
I want you so
Please come in
And you love me more and more
And my love grows up with you
And you kiss me more and more
And I kiss you, too
And I kiss you, too

If I take your heart, I will cherish it every day
If I take your heart, I will heal these old wounds
If I take your heart, it's to make it happy
If I take your heart, it's forever close to mine

But not every heart belongs to any other
You and I
You and I are meant to be
I'm the one for you, You're the one for me
You love me as much as I do
When you look at me and we're skin to skin
I want you so
Please come in
And you love me more and more
And my love grows up with you
And you kiss me more and more
And I kiss you, too
And I kiss you, too

(violin solo!)

I don't care, I don't care
If I'm again carried away
If you swear, if you swear
To give me your heart in return
To give me your heart in return

I don't care, I don't care
If I'm again carried away
If you swear, if you swear
To give me your heart in return
To give me your heart in return


More lyrics: http://www.lyricsmania.com/take_my_heart_lyrics_soko.html
All about Soko: http://www.musictory.com/music/So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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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 Eat. Lea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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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저 제목은 가제고 ㅋㅋㅋ 365를 2진수로 바꾸면 저렇게 됨 ㅋㅋㅋ 그냥 해봄.











<시작>


쏴아아아아아아. 반지하의 창문으로 들려오는 빗소리에까지 신경이 곤두섰다. 창문을 닫으려고 창가로 다가섰는데, 창 밖이 어두웠다. 벌써 그렇게나 되었나, 성호는 창을 세게 닫고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병신이다, 병신이다, 머저리다!"

성호의 외침이 눅눅한 공기에 울려 돌아왔다. 아무렇게나 볼펜으로 직직 그어버린 빈 종이를 구겨 화장대 구석으로 집어던졌다.

털썩, 배우 대기실이 마치 제 방인 것처럼 의자를 몇 개 붙여놓고 편하게 다리를 올리고 앉아 A4파지 뭉치를 노려보았다. 원래 제가 알던 A4의, 210mm의 가로 길이에 297mm의 세로 길이의 그 종이가 아닌 것 같았다. 생각나는 말을 다 우겨 넣어도 이 종이 한 장을 메우지 못하리라. 위가 쓰라렸다. 

며칠째 쏟아지는 비에 눅눅해질 데로 눅눅해진 대기실이었지만, 아랑곳 않고 벌떡 일어나 쇼파 위로 기어올라 몸을 구겨넣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큼큼한 곰팡내가 났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스타일이 있게 마련이라, 뾰족하게 깎은 여러자루의 연필, 원고지, 워드프로세서, 영국의 모 작가처럼 이미 판매도 되지 않는 고물 타자기, 수정할 수 있는 도구, 할 수 없는 도구를 쓴다. 성호는 밥숟갈처럼 익숙한 200원짜리 똑딱이 볼펜과 파지를 껴안고 쇼파에 앉아 머리를 벽에 쿵, 쿵 문대었다. 한 면이 빼곡하게 쓸모없는 정보나 그림, 글로 채워진 파지의 뒷면에 글을 쓰는 게 입맛에 맞았다. 

언제부터 그런 습관이 생겼는지도 몰랐다. 요즘은 어디에 글을 쓰건 결국엔 타이핑을 해서 컴퓨터로 옮겨야 하는 시대인지라, 아예 처음부터 키보드를 붙들고 타이핑을 해 볼까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성호는 한 두 번 시도해보다가 금세 그만두었다. 그 멍텅한 네모난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당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도,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도 정리가 되질 않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워드프로세서를 킬 때 마다, 몇 가지 공정을 통해 볼트와 너트를 만들어내는 공장이 떠올랐다. 쓰는 글자를 받아 삼키는 기계 앞에서, 활자를 뱉어내는 또 다른 기계가 된 것 같다며 성호는 제 방에서 컴퓨터를 치워버렸다.

따르르르릉! 배우대기실  입구의 협탁에 놓인 낡은 전화기가 울었다. 따르르르릉! 

결국엔 다시 파지와 똑딱이 볼펜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익숙한 도구도 오늘같은 날은 도움이 되 주지 못했다. 제 방에서는 글을 쓸 수 없다며 매번 글을 쓸 때마다 파지 뭉치를 들고 연습실 구석과 대기실에 처박혔지만, 그런 떠돌이 행색도 오늘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따르르르릉! 전화기가 아무리 시끄럽게 울어도 성호는 고개 한 번을 들지 않았다.

"병신이다! 병신! 글을 쓸 수 없는 작가라니, 변명할 길 없는 실직자다!"
전화기 울리는 소리에 맞춰 성호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쿵, 쿵, 방음제가 들어간 푹신한 벽에 머리를 계속 찧었다. 

"야아아아옹."

전화기가 좀 잠잠해지자 구석에 숨어있던 극단의 고양이 밥통이 구석에서 슬금슬금 나왔지만, 그가 내는 쿵쿵거리는 소리에 비명을 지르며 다시 장롱 그림자에 숨었다. 

"밥통아, 밥통아, 너까지 날 병신, 축구 취급인거냐."
이제는 꼬리마저 보이지 않게 된 고양이를 향해 성호는 계속 중얼거리며 말을 걸었다.

"정신병자가 뭔 줄 아냐, 밥통?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해서 하면서, 예전에 나왔던 같은 결과가 계속해서 나오길 바라는 게, 그게 정신병자지. 그럼 나는 뭐냐하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쓴 글로 상도, 까짓 상도 좀 받았고, 저번 정부 때는 대통령 각하까지 내 연극을 보러 왔단 말이지. 응? 알아? 그건 아주 높은 사람이란 말이야. 그 뿐이야? 여기 소속 작가로 들어오기 전에도 그 후에도 한 끝발 날렸다 이거야! 그런데! 옛날에 호평을 받았다? 상을 받았다? 좋은 글을 썼다? 그게 이번에도 무사히 잘난 글을 쓸 거라는 이야기가 될 수 있느냐. 하, 그걸 바라고 앉아있으니 내가, 이 내가, 정신병자지."

밥통은 그가 아무리 떠들어도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지만 그는 아랑곳않고 떠들었다.

"글을 못 쓰는 작가! 그건 변명거리도 없는 망상가에 실직자지, 그게 뭐겠어. 어부가 물고기를 못 잡는다, 그럴 수 있지. 농부가 농사를 못 짓는다, 그것도 그럴 수 있지. 둘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거란 말이야. 그런데 작가란 놈은 허구헌날 글을 못 쓰게 됐다 징징거리면서 그럴듯한 이유가 없단 말이야. 환장할 노릇이지."

성호는 머리를 바로 하고 파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형광등 빛을 받아 새파랗게 빛나는 파지는 뒷면에 알 수 없는 숫자가 비춰보였다. 볼펜을 딱 하고 눌렀다가 다시 딱 하고 눌렀다. 입을 다물고 다시 길게 붙여놓은 의자로 기어가듯 가서 반쯤 드러누웠다. 어느 정도 맥락을 제대로 잡을 수 있게 되고 나면 그 뒤는 그리 바닥을 더듬고 돌아다니지 않아도 풀려나가곤 했던 글이 중간에서 뚝, 하고 끊겼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비가 한참을 내리는 동안, 그도 한참을 또 거기 그렇게 앉아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쿵쿵거리는 계단 내려오는 소리에 성호는 고개를 들었다. 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내 조조가 두 손에 뭔가를 잔뜩 들고 발로 문을 밀고 들어왔다. 마냥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도 없어서 엉거주춤 일어나 한 손에 든 큰 마트봉투를 받아주었다.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와서 여기서 쫑파티를 하기로 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봉투 가득한 맥주캔과 과자며 안주거리들을 보고있자니 비로소 실감이 들었다. '코끼리, 날다'는 오늘로 종영된다. 

"프하!"

조조는 두 손이 비게 되자 입에 물고 있던 얇은 잡지를 내려놓고 그제야 이상한 숨소리를 내었다. "프하으아, 그냥 두 번에 나눠서 들고 올 걸 그랬나봐요. 이가 아파. 이거 보기보다 무거워요. 한 번 물어 보실래요, 선쌍님?"

큰 빨강으로 MACK이라고 적힌 얇은 월간지를 입에 무는 대신 성호는 잡지의 중간 페이지를 펼쳐 들었다. 앞 뒤로 팔랑팔랑 몇 장을 넘겨보았다. 며칠 전에 MACK의 기자가 다녀갔다고 들은 적이 있다. 하얀 가면을 쓴 배우가 무대 중앙에 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의 사진에서 손을 멈췄다. '코끼리, 날다.'의 주연이자 운상극단의 간판배우인 안혜영씨다. 사진은 연극의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보랏빛 조명아래 호러물의 한 장면처럼 나오긴 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사진 아래에 빼곡한 글자들을 읽기 위해 잡지를 몸에서 멀리로 가져갔다. 

"안경 좀 하나 사시는 게 어때요?"

옆에 딱 들러붙어 내 어깨 위로 잡지를 넘겨다보고 있던 조조가 핀잔했다.

"됐어. 있어 봐야 쓰지도 않을 거."

비평가들의 글이란 늘상 죄 그렇지만 호평도 혹평도 에둘러 에둘러,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어디로 가고 각종 비유와 선무당 잡는 어렴풋한 철학 운운하는 비유만 가득한 글이었다. 

"-의자에 앉아 관객을 향해 담담히 내일은 없음을 말하는 남자의 모습은 가히 안락의자 탐정의 모습에 비할만 하다. 현실에 대한 풍자를 잊지 않으면서도, 무대 위를 날아다니는 연출을 통해 판타지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 부조리극은 이 시대를 향한 따가운 꾸짖음과 격려를 전하고 있다. 그러니까, 선쌍님, 이게 좋다는 소리예요? 나쁘다는 거예요?"

성호의 시선이 움직이는 곳을 따라 읽고 있던 조조가 불퉁하게 물었다. 

"난들 알겠냐."
성호의 대답도 영 불퉁했다.

"아, 몰라. 선쌍님 오늘 쫑파티 오실겁니까?"
"그래야지." 
성호는 잡지에 코를 박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한참을 더 미간을 좁히고 보더니 잡지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런데 오늘이 종영인데 안 보러 가십니까, 선쌍님?"

돌아간 손목시계를 힐끔 봤다. 8시 50분. 2시간이 조금 안되는 분량이니 이제 한창 중반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초연도 그렇지만 종영날은 유난히 관객이 몰린다. 배우도, 감독도 마지막임을 알아서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애를 쓰는 만큼의 여운이 더 있을 것을 기대하는 걸 수도 있고, 많은 날의 연극을 통해 아주 숙련된 날의 연극이 보고 싶은 걸 수도 있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연극의 마지막날이라는 안타까움에서 일 수도 있겠다. 바짓단이 흠뻑 젖을 정도로 비가 대차게 내려치는 날씨를 생각해보면 오늘은 빈 자리가 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짐을 부스럭거리며 정리하고 의자와 책상을 붙이고 있는 조조를 뒤로하고 성호는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올랐다. 조조가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을 성호의 구겨진 점퍼를 덮고 자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봤고, 그 점퍼가 거기 있다는 것도 몰랐던 성호는 그러라고 했다. 

계단을 올라 왼편으로 가면 건물의 입구의 소극장에 있는 작은 카페가 나오고, 오른편으로 두 번 꺾으면 무대 뒷 쪽의 출입문이 나온다. 무대 뒤에는 연출과 이미 무대에 나갔다 온 배우 둘이 모니터를 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제 무대는 연출의 손을 벗어나 있었고,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 밖에는. 지금은 그도 한 명의 관객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마지막 날인데, 기분이."

성호는 연출의 옆의 빈 의자에 앉으며 말문을 텄다.

"허허, 작가님은 그 다 좋은디, 말 하는 순서가 만날 어째 그래 요상스럽습니꺼. 그냥 싱숭맹숭하네예." 

"죄송합니다. 이번 건 좀, 별로 반응이 안 좋은 것 같네요."

아닌 게 아니라, 거의 매번 만석이던 이 극단의 관객석에 빈 자리가 이렇게 매번 듬성듬성한 건 이번 작품이 처음이었다. 관객은 어설픈 잡지사의 호의없는 칭찬보다 냉혹하고 객관적이다. 

"아이고, 그게 어째 작가님 탓인기요, 이 놈의 비가 허구헌날 와갔고 사람들이 바깥나들이를 안해서 그렇체. 근디, 작-가님."

연출이 길게 '작-가님'하고 늘여서 부르면 먼저 자리를 피하고 싶어진다. 

"네."
"근디 당장 내일부터 연습 들어가기로 했는데예, 대본이 쪼까..."
"죄송합니다."
"내일까지는 어떻게 되겠지예? 거, 10장도 안 남은 거 가꼬 그래 질질 끌지 말고 후딱 써버립시더."

나란히 앉아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하얀 가면을 벗어던진 배우가 두 팔로 훨훨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제야 연출을 고개를 돌려 성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채의 연출의 눈이 성호의 시선과 맞닥뜨렸다. 먼저 눈을 피한건 성호였다. 

"쪼가리 대본을 주고 애들 연습시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꺼. 좀 부탁합니더."
다혈질인 그답지 않게 연출은 오늘따라 조근조근했다. 

"아, 그리고, 그 뭐시기냐, 희망 어쩌고 하는 거. 안작가님 마누라가 쓴 거."
성호는 "네."라고 뜸을 들여 대답했다.

"그거, 담주 화요일인가 올라간다 카는 거 얘기 들었을 거 아입니꺼. 왜 얘길 안하요. 아따, 내 까먹으면 어쩔라꼬. 그리고 어째 사람이 그러요. 아따, 지 마누라 연극이라 카는데 현장에 얼굴 한 번을 안 내밀고 그래싸. 여하간에, 뭐, 그기야 안작가님 사정이니까네, 내 두 말은 안하겠는데, 딸내미 데리고 보러 가쇼잉. 내도 좀 거들고, 아무튼 소정씨 아는 이 바닥 사람들은 죄다 거들어서 올리는 거니께. 그리 섭섭치 않게 맹글었을끼요. 아, 그거, 아따. 좀 인상 좀 피쇼. 거, 접때 조조가 어데 응모했다카더만, 그건 어떻게 됐는가 모르겠네."

연출은 주섬주섬 안주머니, 뒷주머니며 바깥주머니까지 부스럭거리더니, 결국 차고 다니는 작은 가방에서 하얀봉투를 찾아 내밀었다. 성호는 반을 곱게 접은 봉투를 조심히 열어보았다. 넉넉하게 10장 남짓한 표가 들어있었다. 일주일간 올리는 연극이라고 들었다. 1회 상영부터 막이 내리는 6회 종영까지 죄다 넉넉히 챙겼음에 틀림 없었다. 연출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골이 울렸지만 성호는 다시 꾸벅 고개까지 숙여 감사를 전했다.

다시 어깨를 붙이고 앉아 모니터를 멍하니 보았다. 와이어를 단 배우가 땅에서 겨우 1M 떠오른 곳에서 활개를 치며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자유로워 보이는 게 아니라 꽁지를 붙잡힌 채 퍼덕이는 고추잠자리 같았다.  

성호는 손에 여즉 쥐고 있는 파지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계속 손에 빈 종이를 들고 다니는 건, 자신이 무능력하다고 광고하는 걸지도 몰랐다. 얼굴에 갑자기 피가 몰렸다. 하얀 면이 보이지 않게 종이를 뒤집어 무릎 위에 다시 놓았다. 뜻을 알 수 없는 숫자의 나열 위에 '6월 예산안'이라고 볼드한 14포인트의 바탕체가 박혀있었다.




<2화>

모니터로는 조명 밖의 어두운 관객석은 보이지 않는다. 성호는 굳이 커튼 쪽으로 고개를 길게 빼고 관객석을 유심히 보았다. 빈 자리가 하나, 둘, 셋, 어림으로 세어봐도 뒷 줄 한 줄은 텅 비었으니 열 자리 남짓이 빈 셈이었다. 

"근데, 전화 돌려 드렸는데 받으셨어라?"
연출이 뒤에서 어깨를 톡톡 쳤다. 성호는 아까 시끄럽게 울렸던 전화를 겨우 기억해냈다.

"무슨 전화였는데요?"
"그 뭐라카드라, 어쨌든 따님이던데. 급해 보여가꼬 그냥 바로 전화 돌리삔기라, 또 전화 안받으셨고만. 안선생, 그 버릇을 좀 고치던가, 핸드폰을 하나 장만하든가 하쑈. 만날 그 전화 한 통 할라카면 이리 걸고 저리 걸고 해야 된다 아입니꺼."
성호는 마른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전화 한 통만 좀 하고 오겠습니다, 감독님."
"아입니다, 내 전화 쓰이소."

성호는 연출이 내민 투박한 플립폰을 받아들지 않고 감사하다고 인사만 했다. 안쪽의 사무실에도 전화기가 있을 테고, 바로 바깥의 매표소에도 전화기가 있을 텐데 불편한 핸드폰을 쓰고 싶지 않았다. 연출도 성호의 사정을 아는지라 두 번 권하지 않고 길을 비켜주었다.

따르르르릉!

사무실 문을 여는데, 때를 맞춰 전화벨이 울었다. 성호는 서둘러 수화기를 들었다.

"네, 안성홉니다."
여보세요, 라고 대답하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 자넨가."
"아, 장인어른."
전화하는 상대에겐 보이지 않을텐데도, 성호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고개를 꾸벅거리며 수화기를 귀에 가까이 댔다. 

"흠흠, 아직도 핸드폰을 안 만들고 뭐하는 겐가. 전화 할 때마다 이리로 하려니 영 이상하구만."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아닐세, 아냐. 타박하려고 전화한 게 아니라. 자네 다음주 우리딸 연극 하는 거 들었나? 크게 시민회관에서 한다고 거, 윤감독이 전화해서 자랑자랑을 하던데."
"네, 장인어르신."
"언제 보러 갈텐가. 내 일정을 맞춰봄세."

성호는 비어 있는 왼손으로 이마를 짚고 마른 땀을 훔쳤다. 
"제가, 시간이..."
"음?"
"아닙니다, 확실히 날짜 잡아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네. 아이고, 늙은이가 되서 내가 시간이 많다고 너무 서둘렀나보네. 주책이야, 주책."
"아닙니다, 장인어른.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데, 충남은 어떻게 좀 비피해 없이 괜찮습니까? 안 그래도 연락을 드린다는게..."
"요 마당 앞에, 그 조그만 무화과 나무 있던 거 기억나나? 그게 뿌리가 다 나와서 쓰러졌드만, 안그래도. 에잉, 자네는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장인어르신, 사람이 안 다쳤다니 다행입니다, 그래도. 건강 조심하시고, 장모님한테도 안부 좀 전해 주십시오. 며칠 내로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들어가십쇼."
"그래, 자네도 건강 좀 챙기고, 수고하게."

전화음이 끊어지고 나서야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성호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절로 입가가 실룩거리고 미간이 좁혀졌다. 위가 또 쓰려왔다.

하아.

실이 끊어진 것처럼 바닥의 대자리 위에 두 다리를 내동댕이 치고 앉았다. 아직도 어려웠다. 결혼한 후의 햇수로만 20년, 왕래하고 지낸지는 그보다 좀 더 되었을 사이였지만, 3년 전의 일이 있은 뒤로 장인어른을 뵐 면목이 없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에 등어리가 축축해졌다. 

불편한 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성호는 전화기 아래 늘어져 얼기설기 엉켜있는 전화선을 노려보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따르르르릉-.

허리를 찔린 생선처럼 놀라 펄쩍 일어나 수화기를 낚아챘다.

"네, 안성홉니다."
"안성호? 안미진양 보호자 되십니까?"

지독한 기시감이 구불구불하게 엉켜있는 전선을 타고 넘어왔다. 이소정씨 보호자 되십니까? 여긴 춘천시 봉화지구대 파출소입니다. 성호는 책상에 몸을 기댔다.

"네, 맞습니다만..."

여긴 신림동 어느 파출소인데 안미진씨를 보호중인데 가능한한 빠른 시간내로 방문 부탁드린다, 안미진씨가 전화를 몇 차례 했지만 받지 않으시더라. 아주 익숙하고 덤덤한 목소리로 경찰은 제 용건만 밝히더니, 성호가 '네'하고 대답하기가 무섭게 통화를 끊었다. 무슨 일인지 물을 새도 없었다.

왜 미진이가 전화를 했을 때 나는 받지 않았던가, 도대체 무슨 일인데 미진이가 경찰서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은 왜 경찰이 전화를 했을까, 어디 다치기라도 한걸까. 머리가 핑핑 돌았지만, 그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성호는 저도 모르는 새 벗어던진 신발 한 짝에 발을 꿰고 허둥지둥 사무실을 나섰다. 이제 갓 스물이 넘도록 경찰서 문턱이라곤 밟아 본 적도 없는 미진이가 당최 무슨 일로 거기 있는 건지, 괜찮은건지. 생각은 뒷 일이었다. 우선 딸을 그 기분 나쁜 곳에서 데리고 나오는 게 우선이었다.

한 달음에 극단 입구까지 나왔지만 비가 만만찮았다. 택시를 잡으려면 큰 길까지 2,3분을 걸어나가야 할 터였다. 성호는 이를 갈며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내려갔다. 갈 때 비를 맞는 거야 아무렇지 않았지만, 딸을 데리고 오려면 우산이든 뭐든 있어야 했다. 

조조는 배우대기실을 혼자 차지하고 팔자좋게 늘어져 자고 있다가, 쾅! 하고 거칠게 열리는 문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밥통도 타타타탁! 잽싸게 장롱 바닥 아래로 숨어들어갔다.

"차 키 좀 빌려줘. 당장 쓸 일 있어?"
"선쌍님, 무슨 일 있습니까?"

조조가 잠바를 접어 쇼파 구석에 밀어넣고 주머니를 뒤져 키를 꺼냈다.

"미진이가, 경찰서에 있다네."
"미진이가요? 무슨 일인데 그럽니까? 어디 다친덴 없데요?"
조조도 안색이 변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르겠다. 일단 가봐야지. 요 바로 앞 파출손데, 키 좀 이리 줘 봐."
"아닙니다, 제가 운전할게요."

조조는 바닥에 놓인 맥주더미들을 재주좋게 넘어서 성호를 데리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파라솔같이 커다란 우산도 잊지 않았다. 

극단차로 쓰는 미니벤을 타고 10분 거리 안에 파출소가 있었다. 밤 9시가 넘어가는데도 새하얗게 불을 밝히고 있는 모습이 믿음직하기보다 먼저 불안했다. 성호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다가, 차를 주차하자 서둘러 내렸다. 파출소 건물을 보니 막상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이는 성호를 앞질러 조조가 먼저 성큼성큼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가버렸다.

공문을 작성하는 건지, 고스톱이라도 치고 있는 건지, 경찰 두엇은 모니터에 코를 박고 둘의 행색만 힐끗 보더니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제일 어려 보이는 새하얀 얼굴의 경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조와 성호를 향해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어떤 볼일로 오셨습니까?"
"어떤 볼일인지 나도 모르겠소! 그것부터 먼저 좀 들어봅시다."

성호는 괜히 툴툴거리며, 경찰의 이어진 대꾸를 들은 척 만 척하곤 제일 안쪽의 창가로 다가갔다. 미진이 두 다리를 모으고 쇼파 위에 앉아 있었다. 간이 유치장에라도 들어있는 건 아닌가 걱정했던 성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진에게서 술냄새가 확 풍겨왓다.

"어쩐 일로 그렇게까지 마셨냐."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라 딸의 어깨만 짚고 선 성호 옆에서 조조가 미진을 나무랐다.

"이제 너도 스물 넘은 처잔데, 내가 술 마시라 마라 할 수는 없지만, 미진아. 선쌍님이 얼마나 얼굴 새파래져서 뛰어왔는 줄 알아? 여자가 이 시간에 술을 먹고 집 밖에 나돌아다니고, 그러면..."

성호가 손을 내저어 조조의 말을 끊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누가 보면 나라를 팔아먹은 죄인인 줄 알겠다. 고개 좀 들어봐라. 미진아."
"아빠."

대답이 없을 줄 알았던 미진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아빠, 아빠, 아빠, 미안, 미안해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기시감이 눈앞을 새까맣게 덮쳐왔지만, '아빠'라는 낯선 글자가 성호의 팔을 들어 딸의 어깨를 토닥이게 했다. 깊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지만, 마누라가, 소정이 여기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애엄마는 손을 어떻게 뻗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이 한밤 중에."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다녀오겠습니다, 잘 먹겟습니다, 의 인사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딸과 하는 대화가 어색한 성호는 딸의 대답이 없자 저도 입을 꾹 다물었다. 아주 다행인 것은 딸은 울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달래는 법도 몰랐다.

딸은 그 뒤로 한참을 입을 열지 않았고, 그들이 하는 양을 보고 서 있던 얼굴 허연 젊은 경찰이 다가왔다.

"안미진양 보호자 되십니까?"
"네, 그런데요." 
조조가 대신 대답했다. 이제와서 물은 게 제가 생각해도 우스웠는지 경찰은 괜한 기침을 했다.

"안미진씨께서 술을 자시고, 경찰서 바로 앞에 주차된 차를 열쇠로 긁어대고 있덥디다. 담배 피러 나갔다가 내, 원. 도대체가. 차주가 연락이 안되서 일단 보호자분께 연락을 드렸습니다만, 나중에 차주와 연락이 되면 다시 출두하셔서 합의를 보셔야 될겁니다."
"네."
"아, 그럼..."

경찰은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더니 앉은 채의 경찰 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 분들 귀가조치 해도 괜찮습니까, 반장님?"
"물어보지 말고 알아서 좀 해라. 넌 도대체 뭘 배우는 거냐? 어서 모시고 가시라 그래. 아오, 그냥 술 냄새가 여기까지 나네. 그 좀 작작 드시고 다니라고 좀 하고."

차를 열쇠로 긁었다고?

성호는 손을 덮어 입가를 가렸다.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밴을 타고 경찰서까지 오는 내내 생각했던 그 모든 일에 비하면 그쯤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심지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라는 것까지 마음에 들었다. 마음이 놓였다. 목에 빳빳하게 들어가있던 힘이 그제야 풀리고 뻐근해졌다.

소파에 앉아 넋을 놓고 있던 미진이 겨우 정신을 추스려 자리에서 일어날 즈음에는, 조조가 서류 작성을 죄 끝내고 밴을 파출소 앞으로 몰아왔다. 조조가 쫑파티는 됐으니 집에 내려주겠다 해서 20분 거리에 있는 집 근처의 골목에 도착할 때까지 딸은 내내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있었다. 

성호와 미진을 파라솔같은 우산까지 같이 골목어귀에 내려주고서야 조조는 '내일뵙겠습니다, 선쌍님! 내일 꼭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하면서 인사하고 가버렸다. 쫑파티에는 아마 조금 늦을 터였다. 성호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 뒤를 배웅했다.

"아빠."

"음?"

추적추적 쏟아지는 비를 어떻게 해치고 골목을 지나 집 앞 처마에 도착하자, 미진이 조용히 성호를 불렀다. 어깨가 푹 젖은 성호는 빗웅덩이만 보면서 미진의 뒷말을 기다렸다.

"있잖아..."
"이 시간에 경찰서라니, 처음이니까 봐준다. 또 이런 일이..."
"그게 아니라..."

미진이 성호의 옷소매를 슬쩍 잡아 당겼다. 

성호는 미진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딸의 얼굴을 본 게 얼마만이던가. 딸은 제 엄마를 쏙 빼닮은 고집스러운 입매를 하고 있었다. 예뻤다. 제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예뻤다. 풀 죽어 있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렇게 화가 나지 않았다고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몰랐다. 성호가 조용히 말을 고르는데, 미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빠... 내가... 있잖아... 그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내가... 엄마를 죽였어."







<3화>

띡띡띡띡 띡띡띡띡-.


알람시계 소리가 아니라도 일어날 참이었다. 비가 창을 때리는 소리가 밤새 시끄럽더니,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 성호는 찝찝한 이불을 걷고 창가로 다가섰다. 여름에도 이불을 덮고 자야 하는 습관 때문에 온 몸이 땀범벅이었다. 7시가 맞는지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바깥이 너무 어두웠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제 딸이 이상한 소리를 한 것도 솔직히 제정신으로 한 소린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딸은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더니, 집에 들어와서는 속에 든 걸 다 게워놓고서야 잠에 들었다. 성호도 성호의 마누라도 주당이 아니니, 딸이 술을 잘 마시는 것도 이상한 노릇일 거다. 그리곤 속이 안좋다며 쇼파에 앉아서 헛구역질을 하더니 앉은채로 잠이 들어버렸다. 딸을 뉘어주면서 성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딸의 술 뒤치닥거리를 해 보는 건 처음이라서, 화나기보다 신기했다. 물을 주지 않아도 딸은 성호가 모르는 곳에서 이만큼이나 자라있었다.


술을 그렇게 마셨으면 혼자 마셨을리가 없을 터였지만, 그것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딸이 한 말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딸이 잠든 후에야 다시 파

지를 잡고 자리에 앉았지만 안 써지던 글이 그렇게 복잡한 잡생각 속에 갑자기 써지게 되는 것도 아니라서, 하얀 종이에 침을 묻히며 졸다가 어느 순간 침대에 가서 자버렸던 것 같다.


"흐아아암."


하품은 났지만 더 이상 잠은 올 것 같지 않았다. 거실로 나오자 딸도 잠에서 깼는지 바닥에 붙이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갈아입을 옷이 마땅치 않았는지 엄마의 잠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색이 영 말이 아니었다.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이상할 정도로 인사만은 늘 예의발랐다. 마누라가 늘 예의를 입에 달고 다닌 탓이거니 했지만, 성호는 들을 때마다 그렇게 깍듯한 인삿말이 낯간지러웠다.


좀처럼 서지 않는 부엌에 섰다. 저런 얼굴의 딸을 보자 절로 발길이 이리로 향했다.


예진이 장을 봐 놓고 간 봉지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냉장고 안에는 말라 비틀어진 당근과 양파 조각이 나뒹굴 뿐이었지만, 예진이 어제 놓고간 큰 마트 봉지 안에는 제대로 생긴 파와, 계란 12개 들이의 종이 팩과, 대충 국이라도 끓일 수 있을 만한 다싯거리가 있었다. 콩나물 묶음이 제일 반가웠다.


성호가 콩나물로 국을 끓이고 햇반 두 개를 꺼내 놓는 사이, 딸은 비척비척 걸어와 식탁에 턱을 괴고 그가 하는 양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 내가 어제 무슨 이상한 소리 안 했어?"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눈치였다. 성호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니."
그리고 아차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딸의 표정이 상상이 갔다. 3년 전에 했던 그의 '아니.'처럼, 이번에도 딸은 그의 어설픈 부정을 알아 챈 얼굴이겠지.


둘은 입을 꾹 다문 채 마주앉아 간이 제대로 되지 않은 콩나물국에 김치를 반찬으로 아침을 떼웠다.


"오늘은 학교 끝나고 이쪽 집으로 올게, 아빠."
딸이 먼저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어제 입고 온 옷을 그대로 입고 가게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딸이 이리로 온다니 다행이었다. 딸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성호는 딸의 이상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성급히 캐묻지 않은 거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제대로 얘기를 해 봐야 했다. 그 이야기에 대해서, 긁었다는 차에 대해서.


오늘도 극단에 얼굴을 내밀어야 했다. 쫑파티에 얼굴을 내밀지 않은 것도 실례되는 일이었고, 오늘은 첫 연습날이니 가서 인사라도 해야 할 터였다. 그리고 글이 막힐 땐 방에 처박혀 있느니 뭐라도 하는 게 나았다. 인간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고 있는 게 크게 도움이 될 때가 많았다. 어젠 별로 그렇지 못했지만, 오늘은 그럴 것이다.


성호는 지갑이며, 열쇠며, 쉽게 잊고 문을 나서는 것들을 주섬주섬 챙겨 가방에 우겨넣었다.





극단 입구까지 느긋하게 걸어간 성호를 제일 먼저 반긴 건 담배를 피느라 밖에 나와 있던 조조였다.

"선쌍님! 오셨구나, 선쌍님! 제가 맨날 들락날락하면서 하는 게 없어 보여도, 사실 글을 한 편 써 봤거든요, 선쌍님! 근데, 내가 생각해도 이번 건 좀 괜찮은 것 같아서요. 한 번 읽어 봐 주면 안될까요, 응?"
"그래, 좀 있다가 보마. 일찍 왔네. 밥은 먹었냐?"
"그, 누구더라, 아, 다자이 오사무 알죠, 알죠? 선쌍님, 아, 물론 내가 작품을 막 빼끼고 그럴 사람은 아닌 거 알잖아요. 선쌍님! 근데, 내가 딱 써놓고 읽어보니까, 다자이 오사무 삘이 좀 나면서, 아, 어쨌든, 너무 잘 쓴거야! 선쌍님, 이건 정말 대박! 대박!"

"극단 식구들은, 아침 먹었고?"
"가로로 다단 나눠서 출력해서 들고 왔거든요. 아, 왜, 저번에 그냥 줄글로 들고왔다고 선쌍님이 쓰레빠로 막 나 후려패고 그랬잖아요!"
"내가 언제 후려팼..."

"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선쌍님, 딱 그럴 포스였다니까요! 쓰레빠를 손에 쥐고 내 눈을 딱 지긋이 보면서 '이걸 지금 나보고 읽으라고 들고 온 것이냐.' 딱 그랬잖아요! 어쨌든, 그래서 모아찍기 해가지고, 이게 글씨가 폰트가 몇이더라..."
"돈도 없는 녀석이 담배는 왜 맨날..."
"들고나올게요!"
휑하니 조조는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돈이 아니라 정신머리가 없는 녀석이다. 사람 말을 제대로 귀기울여 듣는 법이 없었다. 3년 전까지 성호 마누라의 문하생으로 있던 놈이었다. 당시엔 개 고양이처럼 서로 근처에 있으면 슬슬 피해다녔지만, 그 뒤로 어쩌다 보니 정이 들어서 지금은 성호가 데리고 있었다. 극단에서 잔일을 하면서 극본을 쓰고 있다. 성호의 마누라는 늘 둘을 보면서 '쏙 빼다박은 사람들끼리 왜 그래? 동족혐오라는 거야?'라며 놀리곤 했다.

원고를 들고 나오겠다는 놈이 성호가 담배를 하나 다 태울 때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꽁초를 짓이겨 뭉쳐 주머니에 넣고,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갔다. 연습이 한창인지 1층에서 발성연습하는 소리가 지하까지 울렸다. 언제 들어도 쭉 뻗는 목소리가 울려 들리는 배우들의 목소리들은 부럽도록 좋았다.

"아, 선쌍님, 잠깐 좀."

이제와서 오탈자를 교정하겠답시고 빨간펜을 들고 있는 놈의 손에서 흰 파일을 뺐았다. 파일 표지에는 삐뚤한 글씨로 '조조'라고 적혀있었다. 제 필요할 때만 꼬리를 살랑거린다고 간신배라 하여 성호의 마누라가 붙여준 별명이었다. 파일을 폈다. 속지는 가로로 모아찍기가 되어 있고, 장마철 들어 부쩍 침침한 성호의 눈에도 잘 읽힐 만한 여백과 폰트였다. 이번에는 정말 슬리퍼를 손에 들 필요가 없겠다.

그리고 끝까지 단숨에 읽어내렸다. 좋았다.

성호는 파일을 덮고 조조를 봤다. 조조는 성호가 글을 읽는 내내 옆에 들러붙어 불안한 얼굴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성호가 잃어버린 순수함과 열정이 녹아 있었다. 조금 격렬했지만, 그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관객에게 날 것으로 다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나치게 세세한 지시문도 좋았다.

"어때요? 괜찮아요? 이번에도 이딴 걸 읽으라고 가져왔나, 하실 거예요? 선쌍님, 뭐라고 말 좀..."
"오늘 식사는 어쩌기로 했냐?"
"에? 선쌍님, 그래서 잘 썼다는 겁니까, 못 썼다는 겁니까?"
"식사는?"
"선쌍님, 그래서... 아이고. 네, 선쌍님, 맨날 먹는 집에서 도시락 사오기로 했는데요."
"사왔어?"
"아뇨, 지금 사러 갈려고... 먼저 말씀해주시면 안될까요, 선쌍님."
"일단 사오고 얘기하자."

조조는 밥통을 걷어차버릴 것 같이 쿵쿵대며 입을 삐쭉거렸다. 하지만 그런 시위를 성호는 본 척도 않았고, 조조는 어꺠를 축 늘어뜨리며 대기실 문을 열었다.

"아, 그리고 감독님이 대본 오늘까지 좀 달라고 하시던데요."
"알았다, 어서 갔다오기나 해."

쾅.

조조가 나가고 밥통이 문소리에 놀라 숨어버리자 조용한 대기실엔 성호 홀로 남았다. 습관적으로 여기서 글을 쓰는 일이 많아서 대기실 여기저기엔 파지뭉치가 널려있었다. 그 중 하나를 손에 들었다가, 다시 흰 파일을 폈다.

"밥통아, 나는 이제 영영 다시는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없는 거냐. 평생 쓸 글자를 너무 펑펑 다 써버려서 이제 한 글자도 쓸 수 없게 된 거냐. 병신이 되버렸다. 어떻게 할까."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성호는 흰 파일을 팔락팔락 넘겼다.

"어제는 내 딸이 내 마누라를 죽였다고 그러더라."

성호는 파일을 덮었다. 다시 봐도 글은 좋았다. 조조가 여태 쓴 것 중 제일. 일어나 대기실 입구로 갔다. 아무래도 연습을 봐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근데, 나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거든. 그야, 내가 죽였으니까."

성호는 맨발에 신은 구두가 불편한 듯 신발을 끌며 계단을 올라갔다.






<4화>

배우들은 마무리가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쪼가리 대본을 가지고 열을 올려 연습하고 있었다. 성호는 목이 칼칼했다. 담배를 한 대만 더 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실내에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간 또 예진이며 조조며 잔소리를 해댈 게 분명했다.

성 호가 선 쪽의 관객석이 아주 어두운데도 배우들은 용케 그임을 알아차리고 눈인사를 보내왔다. 성호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연출은 어디에 갔는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서로 대화를 섞는 부분을 맞춰보는 배우들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한마디도 제대로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습관처럼 손에 쥐고 나온 파지를 무릎에 얹고 관객석 제일 뒷 자리에 앉았다. 서로에게 신경쓰이지 않을 이정도 거리가 좋았다.

성호가 볼펜을 똑딱거리는 사이 소란스럽던 이야기들이 정리되고, 무대 위의 기물들이 다 치워지고, 연습이 시작되었다. 어제 막이 내린 흥분이 가시지 않은 건지 다들 의욕적으로 굴었다. 

운상극단의 주연을 대부분 도맡아하는 간판배우가 무대 정중앙에 나와 섰다. 한 쪽엔 파란 양말을, 또 다른 발엔 노란 양말을 신고 있었다. 어제서야 받았을 대본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남자에게는 고질병이 있다."
무대 끝,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 의자가 두 개 놓여있고, 그 중 하나에 앉은 여자배우가 만면에 미소를 그리며 해설했다.

"그건 바로, 여자혐오증이다."
그 바로 옆 자리에 앉은 남자배우도 재밌다는 얼굴을 하고 번갈아 해설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차례로, 쉴틈없이, 빠르게.

"원래부터 이 남자가 여자를 혐오했느냐, 그건 아니다."
"상상해보라, 어느 남자가 태어날 때부터 여자를 혐오하겠는가?"

"그렇다고 이 남자가 게이라고 생각한다면, 오, 이런, 그건 아니다."
"여자와 손잡기 싫어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발바닥만한 바퀴벌레를 보고 도망가는 딱 그 모양새다!"
"아니면 0.5%인상된 등록금고지서를 딱 열어본 엄마의!"
"아니면 10년만의 기록적인 호우로 인한 산사태로 하루아침에 아빠를 잃어버린 딸의!"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신발을 벗어들고 도망가고 싶어한단 말이다!"

텅 빈 무대 중앙을 혼자 독차지하고 선 안씨는 해설에 맞춰 이리 도망갔다가 저리 도망갔다가 신발을 끝내 벗어들고 불안한 눈초리로 옆을 두리번거렸다. 해설을 하던 여배우가 계속 웃는 얼굴을 하고 슬쩍 일어나 그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간다. 남자배우의 해설.
"만약 이렇게 여자가 제 바로 옆에 오기라도 하면!"

"히이이익"
안씨는 무대 반대쪽 끝까지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도망간다.

"저모양이 되는 것이다."

여자배우는 어깨를 으쓱한다.
"나처럼 예쁜 여자든, 아니든, 여자라면 다 저모양이다.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긴 글러먹었다."

남자배우도 의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의자 두개를 양쪽 어깨에 척척 짊어지고 무대의 반대쪽 끝으로 가서 다시 내려놓는다.
"그래서 이렇게 어두운!"

조명이 갑자기 침침하게 어두워진다.

"아니, 이건 너무 어둡잖아! 여기에 달이 뜬!"
여배우가 말하자 배경에 달이 애니메이션 처리되어 휙,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다. 조명도 약간 더 밝아진다.

"이런 밤에만 길거리를 쏘다닌다."
"대낮에는 길을 다닐라치면 길거리에 널린 게 여자다!"
"무서워서 도무지 걸어다닐 수가 없다!"
"한밤중에 집에서 스슥 기어 나와서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가는데!"

해설하는 두 배우는 천천히 무대를 돌아 의자에 가 앉는다. 침을 꿀꺽 삼킨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제일 뒷 자리에 앉은 성호에게까지 보인다.

"그래서 그가 찾아낸 곳이 여기다."
"절대 한 밤 중에는 사람을 마주칠 일 없는 곳!"
"서울에 도대체 그런 곳이 있기는 한가, 했던 그가 우연히 생각해낸 이 곳!"
"새벽 2시가 넘은 지금, 절대 여자를 마주칠 리 없는 곳!"

두 배우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서로를 마주보더니 입을 모아 말했다.
"공동묘지."

그리고 해설하는 사람들의 의자 쪽의 조명이 꺼진다. 관객석에선 안씨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머리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로 덜덜 떨고 있던 안씨가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핀다. "아, 아무도 없겠지?" 아주 느리게 손에 들고 있던 구두를 발에 꿰고 주위를 겁먹은 눈으로 살핀다. 

처음엔 느릿한 동작으로 돗자리를 펴고 묘비석에 기대 책을 보고, 음악을 듣다가, 점차 동작에 속도가 붙는다. 급기야는 엠피쓰리 볼륨을 올리고 촌스러운 쿵짝거리는 디스코에 맞춰 막춤을 추기 시작한다.

흐흐흐흐흐.

무대 전체를 종횡무진하며 부끄러운 막춤을 춰댄다.

흐흐흐흐흐.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엠피쓰리를 끈다. 관객석에 들리던 음악도 멎는다.

흐흐흐흐흐흐흐흐흐. 잔뜩 에코를 넣은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쾅!

"선쌍님!"

놀란 건 성호 혼자가 아니었는지, 여기저기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리고, 연습실 전체의 조명이 순식간에 들어왔다. 성호는 제 간이 붙어 있을 자리를 세게 움켜쥐고 앞 좌석 등받이에 고개를 묻었다. 조조 이 자식을 그냥.

"어라? 첫 날인데 꽤 본격적으로 연습하나 보네요."

조조의 뒤통수를 딱, 소리나게 파지뭉치로 때렸다. 

"아, 왜요!"
"살살 좀 못 다녀?"

성 호는 소리를 꽥 질렀다. 시계를 힐끗 봤다. 도시락을 사오라고 한 제가 언젠데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 온건지. 사람 잡을 일 있나. 내장이 다 놀라서 벌렁거리는 것 같았다. 아직까지 새하얀 백지 상태인 파지를 보이지 않게 뒤집어 놓고 볼펜을 끼워 발치에 내려놓았다.

배우들도 다 조조에게 한마디를 했지만, 다 농으로 하는 이야기였다. 조조는 극단에서 하는 일 없이 늘 돌아다니긴 했지만, 사람들을 워낙 잘 챙기기도 했고, 붙임성도 좋아서 다들 그를 예뻐했다. 

연 습은 갑자기 흐지부지해졌다.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다들 잠깐 숨을 돌리고 아침 겸 점심을 먹자고 이야기가 되었다. 아직 연출이 오지 않아서 쉬엄쉬엄 하자는 분위기였다. 쉬지 않고 떠든 배우 둘은 목을 축이며 자리에 앉아 대본을 다시 펼쳤다. 안씨는 겨우 몇 마디 하지도 않았지만 움직임이 큰 만큼 벌써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걸 게다. 

성호는 괜히 다시 대본을 잡고 있는 배우들을 보니 조금 미안해졌다. 그가 재밌게 즐기면서 쓴 장면의 대본은 신기하게도 배우들도 잘 외웠지만, 잘 써지지 않아 억지로 쥐어짠 것들은 배우들도 더디 외웠고, 더디 공감하곤 했다.

"어라, 저 달은 뭡니까?"

조조의 시선을 따라가자 갈색 벽돌의 무대 뒷면에 프로젝터로 쏜 달 모양이 아직 덩그러니 떠 있었다.

"이번에 시험적으로 써 볼려고 생각중이야. 언제까지 손으로 오려붙인 물건만 쓸 수도 없잖아. 시대는 변하는데."
"움직이기도 하는 겁니까?"
"뭐, 빔프로젝터니까."
"여러가지로 써먹으면 재밌겠네요."
"그래서 생각 좀 해볼 참이다. 넌 밥 안 먹어?"
"아, 선쌍님 꺼랑 같이 가져올게요."

조 조가 도시락을 풀어놓은 앞 좌석으로 성큼성큼 뛰어갔다. 조명이 켜진 곳에서 보니 뒷덜미며 등이 축축했다. 얼마나 또 뛰어서 온걸까. 그렇게 먼 거리에 있지도 않은 도시락집을 다녀오는 길에 또 어디다 한 눈을 판 게 틀림없었다. 성호는 도시락보다는 담배가 급했지만, 조조가 넘겨주는 도시락을 잠자코 받아들었다.

말 없이 밥을 입에 우겨넣다가, 조조가 갑자기 씩 웃는다. 

"왜?"
"아니요, 그냥요."

조조의 시선을 따라가자, 파지 뭉치에 꽃힌 녀석의 하얀 파일이 보였다. 

"밥 먹고 얘기하면 안되겠냐."
"아닙니다, 선쌍님."

성호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런 귀여운 녀석 같으니. 속내를 숨길 줄을 몰랐다. 

글은 정말 좋았지만, 분명 고쳐야 할 부분도 많았고, 아직 많이 다듬어 지지 않았다. 갈 길이 먼데도 대뜸 칭찬부터 해 줬다간 그 다음 말은 듣지도 않을 게 뻔했다. 쓰는 일도 고역이지만, 수정하는 일도 만만찮게 고되다. 

자 만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게 걱정되는 건 아니다. 까짓 자만 좀 하면 어떤가. 할 수 있을 때 뻐기고 나 잘났네, 하고 뻐겨 두는 게 좋았다. 글쟁이도 인간인지라 칭찬이라는 동력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성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 놈의 얼굴은 이미 제가 잘 썼다고 확신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어떤 칭찬이 떨어질까, 가늠하는 얼굴이었다.

"네 대본이 어떤 줄 알아?"

조조는 칭찬받길 기대하는 강아지처럼 성호를 올려다 보았다. 아니, 강아지보다는 좀 더 큰 육식동물이 건초 쪼가리를 얻어 보겠다고 온순한 척 구는 것 같았다.

배우들의 습관인지, 아니면 도시락에 음미할 만한 가치를 못 느낀 탓인지, 그도 아니면 다들 허기졌던 건지. 도시락 뚜껑을 연지 10분도 안되서, 다들 게 눈 감추듯 도시락을 다 뱃 속으로 밀어 넣고 배 두들기고 있었다. 

성 호는 커피를 끓이는 배우 셋 옆으로 조조를 데려갔다. 조조의 대본이라고 하자 누워서 쉬고 있던 안씨까지 달려들어 재밌겠다고 제가 읽어보겠다고 나섰고, 성호가 몇 장을 골라주자, 재미들린 배우 넷이 서로 배역을 척척 나눠 갖더니 한껏 연극조로 읽기 시작했다. 역시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었다. 순식간에 늙은이로, 어린 소녀로, 기사로, 음유시인으로 돌변해 목소리에 감정을 실었다.

제 대본을 읽는 배우들이 신기한 듯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서 있던 조조의 얼굴이 점점 울상이 되었다. 기대와 자신감으로 빛나던 눈엔 의문과 짜증이 서렸다.

"선쌍님?"

성호는 마침 다 끓은 커피를 조조의 손에 쥐어주었다. 갈 길이 멀었다.








<5화>

조조는 뭐가 마음에 안드는지도 모른채 머리카락을 쥐고 벅벅 긁으며 몇번을 다시 읽어달라고 배우들에게 부탁했다. 울음 섞인 조조의 도움에 배우들은 질리지도 않는지 조잘거리며 같은 부분을 네 차례나 반복했다.

"거기 길 가는 기사님, 위를 올려다 봐요, 올려다 봐요, 올려다 봐요! 홀로 있는 삶은 너무 지루해. 자, 이리 와서 나를 달래 주어요!"
"오오, 그렇게 아름다운 금발을 난 처음보았소! 하지만, 황금빛에 물든 그대여, 나는 급히 가야 할 길이 있다오."
"기사님이신 줄 알았더니, 이제보니 시인이셨군요! 어딜 그리 서둘러 가시나요?"
"전쟁이 나서, 아버님이 사병을 보내신다기에 같이 가서 참전할 생각이오."
"전쟁! 그것이 그리 중요한 것인가요? 곧 시들어버릴 고귀한 청춘보다도? 어서 어서 이리로 와서 나와 함께 놀아요. 내 머리칼은 어제도 그 어제도 향유로 빗어내려 아주 탐스럽답니다!" 

조 조는 좀 진중하게 듣고 있지를 못하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다가 "라푼젤은 그렇게 천박한 케릭터가 아니예요!"라느니 "내 라푼젤은 그렇게 음침하지도 않다고!"라느니 자꾸 토를 달았다. 성호는 가만히 참다못해, 더 이상 배우들을 괴롭히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 담배나 한 대 피고 오자며 성호의 목덜미를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뒤에서 "괄호 열고, 한 손을 하늘하늘 휘저으며, 아름다운 황녀가 유혹하듯이, 괄호 닫고. 제대로 하고 있는데 왜, 뭐가 불만이야!"하는 여배우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엔 웃음이 서려 있었다. 조조의 오만상이 어지간히도 우스운 모양이었다. 대본을 몇 번이고 고쳐 읽어주던 여배우도 이젠 웃지 않을 수 없는지 흐흐흐흐- 웃음 섞인 목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가는 둘을 향해 외쳤다. "그럼 이번엔 괄호 열고, 요부가 아님, 괄호 닫고. 써 놓지 그래?" 




인위적인 조명 빛 아래에 있다가 햇빛 아래로 나오자 눈이 아렸다. 한창 여름의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귀가 먹먹하도록 쟁쟁거렸다.

"안녕하세요, 안작가님, 잘 지내시죠?"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던 파란 잠바의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누구였더라? 눈에는 익었지만 어디서 봤는지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뽀글거리는 파마에 집시나 입을 것 같은 하늘한 원피스 위에 파란 잠바였다. 묘한 매치다. 

"네, 뭐 그렇죠."

"예진이랑은 아직도 그래요?"
"네, 뭐 그렇죠."

모호한 웃음만 짓고 있노라니, "작가님 다음 작품 기대하고 있어요."하며 인사하곤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있던 모양으로, 꽤 몸집이 커다란 노란 털의 개가 그 뒤를 거만하게 따라갔다.

조조와 성호가 말 없이 입구 근처의 벤치에 앉아 있는 동안, 그 이름 모를 여자 말고도 아는 얼굴이 두 명 더 지나갔고, 네 번째로는 연출이 둘의 앞을 지나갔다. 

"남자 둘이서 이런데서 뭐하는 겁니꺼, 시커멓게." 
"그냥, 날이 좋아서."
"심씨, 근디 딸내미가 연락했든데, 뭐 경찰서? 연락왔따꼬. 무슨 일 있습니꺼?"

못내 근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성호와 딸이 아니라, 가뜩이나 밀린 일정과 그의 빈 파지뭉치가.

"그 저번에 표 준 거, 갈끼라?"
"가아죠."
"진짜 갈끼라?"

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야죠."

하지만, 굳이 솔직해질 필요는 없었다. 안 간다고 하면 이야기가 길어질테고, 변명을 해야 할 터였다. 

"거, 진짜 함 가보쏘. 거, 아는 인간들 다 올낀데. 포스터도 잘 나오고, 전단지도 색색 넣어서 찍었던데. 아, 내 정신 좀 보게. 갔고 온다 카는게 깜박해삤네."

조조가 말이 한 마디도 없는 게 신통했던지, 그 쪽을 계속 힐끗거렸지만, 끝내 말을 붙이지 않고 성호에게만 인사를 건네었다.








"선쌍님."
"왜?"
"진짜 안 가보실려고요?"

성호는 새삼스럽게 조조를 돌아봤다. 

"간다고 한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말했나?"

조조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안 가실 거잖아요."

성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안 가실 거잖아요, 선쌍님은 늘 선생님한테 너무하셨어요."

놈 은 따지고 보면 성호의 마누라와 성호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그에게 화낼 권리가 누군가에게 있어야 한다면, 이 놈에게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부인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달갑지 않았다. 성호는 제가 마누라에게 아주 소홀했던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놈이 나무라고 나설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도 많이들 준비했다고 하잖습니까. 한 번이라도 가서 보세요."

성호는 싸구려 라이터를 찾아 담뱃불을 붙였다. 매운 냄새를 들이키자 숨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한사코 대답은 않고 눈만 굳게 감았다.

부 인은 유망한 작가였다. 나이가 마흔의 중반이 넘도록 계속해서 발전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성호의 마누라는 틈 날 때마다 도서관을 가서 100번대와 300번대를 기웃거리며 쉴 새 없이 먹어치우듯 자료들을 읽어댔고, 연극을 보러 다녔고, 영화를 보러 다녔다. 성호가 집에서 빈둥거리며 자고 있을 때에도 극단에 찾아가서 배우들과 이해하기 힘든 토론에 시간을 보내거나, 다른 업계의 사람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를 관찰하고 질문하고 이야기해서, 그 사람들을 껍질 채로 벗겨와 캐릭터를 빚어냈다. 그런 그녀에겐 두터운 팬 층이 있었고, 성호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자주 글이 실리고 홍보되고 섭외가 들어왔다. 부인은 매번 '귀찮아! 홍보가 되면 돈이 되는 거고! 그 돈으로 한 편이라도 더 만들고 싶으니까! 할 거야! 그런데 진짜 이런 걸 사람들이 읽힌 해? 귀찮아!" 라고 조조에게 칭얼거렸다.  

그 사람들은, 그녀의 마지막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고 싶은 것 뿐이었다. 이건 그냥 스캔들이었다. 성호는 그걸 알고 있었다.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그래도 하나뿐인 남편이셨으면서."

성호는 그 말에 눈을 떴다. 몇 모금 물지도 않았는데, 담배는 필터께까지 타들어가고 있었다. 바람 탓이다. 

"예진씨한테는 잘해주세요."

예진씨한테 잘해주세요, 가 아니라. 예진씨한테는, 이었다. 성호는 놈을 노려보았다. 조조도 성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건지도 몰랐지만, 성호는 그 눈이 갑자기 불편해졌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조조가 먼저 눈을 피했다.

그리곤 진심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말과 함께 허리를 구십도로 꾸벅 꺾어 인사를 하고 성큼성큼 성긴 걸음으로 걸어가버렸다. 버스정류장 쪽이었다.

성 호는 노려볼 곳을 잃었지만, 돌이든, 나무든, 벤치에 튀어나온 못이든, 무엇이랄 것도 없이 계속 노려보았다. 지금 뱃 속에서 들끓고 있는 이  말들을 입에 올리면 난 한없이 추해질 거다. 시꺼멓고 새빨갛고, 잘 생각나지도 않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 있었던 나에 대한 분노와, 의심과.
왜 이제야 눈치챈 걸까.  





파 출소에 연락을 하니 연락처를 준다. 그리로 연락하란다. 생각보다 세상에는 합리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이 훨씬 더 많지만 재수가 더러워서 문짝이며 본체를 통째로 물어내라는 어거지를 쓸까 하는 우려가 앞섰다. 공중전화를 찾아 다이얼을 눌렀다.

"여보세요, 파출소에서 합의하라고 연락처를 주셔서 연락드립니다."
"아, 차 긁으신 분? 안녕하세요."

아, 저랑 선 보기로 하신 분? 하는 톤이었다. 

한 시간 뒤에 까페에서 만났다. 그녀는 내가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에 당황한 듯 했지만, 약속을 잡고 제 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그녀는 편집증처럼 하얀 원고지를 몇 초 사이로 들었다 놨다 꺼냈다 넣었다 하고 있는 사람이 차를 긁어서 합의를 보러 나온 사람이라고는 생각치 못한 듯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겨우 서로를 알아보고 나서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필요한 만큼의 말만 하고, 필요한 만큼의 금액만 요구하고, 내 손에 도장비용 영수증을 쥐어주곤 합의를 끝내자 바로 사라졌다. 화내지도 않고, 욕심을 부리지도 않고 정말 도장하는데 딱 필요한 만큼만.

더 이상 혼자 앉아있을 이유도 없어 까페에서 나오는데 까만색 뷰익이 한 대 서 있었다. 그 여자의 차인 모양이었다. 삑삑-. 후미등이 두 번 반짝거리더니, 여자를 태운 차는 쌩하니 내 앞을 지나 주차장에서 빠져나갔다. 합의를 하기 전에는 보통 차를 수리하거나 하지 않는 게 관례라면 관례일텐데, 그 여자의 차는 어디가 어떻게 긁혔던 건지 조금도 흠 없는 까만색으로 반짝거렸다.

딸이 왜 차를 긁었는지 알 것 같았다. 딸도 참 뻔한 짓을 했구나. 











땅 거미가 아파트의 옥상을 집어삼킬 무렵 성호는 아파트 13층의 집에 도착했다. 딸은 정말 일찍 들어와 있었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봉지를 바스락거리는 소리며 철컥철컥 옷장을 뒤지는 소리며, 타닥타닥 찬장을 열고 닫는 소리로 그걸 알 수 있었다. 제 집도 있으면서 요 며칠은 성호의 집에 눌러앉다시피 들락거렸다.

소리는 마누라의 방에서 흘러나왔다. 성호도 딸도, 그 방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드나들지 않았다. 

"여기서 뭐 해?"
"그냥 뭐 좀 찾느라고."

성호의 부인 방이기도 했지만, 딸에겐 제 엄마의 방이었다. 물어놓고 나서야 조금 무안해졌다.

"아줌마가 엄마 사진이 필요하데."

예진이 며칠 전에 전화로 그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났다. 계속 까먹고 있었다.

"언제?"
"오늘."

그 러고보니 예진의 연락이 오지 않은지가 오늘로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극단으로 찾아오는 일은 좀처럼 없었지만, 늘 성호의 집으로 찾아오거나, 음성메세지를 남겨놓곤 했다. 이젠 그게 습관같은 일상이 되어 있어서, 연락이 오지 않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 게 싫었다. 성호는 머리를 흐트려뜨렸다.

먼저 연락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그래도 아주 연락이 오지 않았던 건 아닌 모양이다. 딸에게라도 연락을 한 걸 보니.

딸은 침대 위에 앨범 세 개를 펼쳐 놓고, 옷장 위를 뒤지고 있었다. 의자를 놓고 그 높은 구석을 뒤적인만큼 뭐라도 나오면 좋았으련만 별 성과는  없는지, 잠깐을 더 뒤져보더니 의자에서 내려와 한숨을 푹 쉬었다. 

"그 차 주인 만났어?"
"어."
"어떻게 됐어? 막 화내?"
"아니. 그냥 돈만 주고 왔어."

좋 은 일도 아니었지만, 원만하게 해결될 수만 있다면 그렇게까지 죽상을 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제 잘못을 알아서인지, 돈이 아까워서인지. 성호는 점점 더 튀어나오는 딸의 입이 우스웠다. 하나도 자라지 않았다. 아내가 딸을 번쩍 품에 안을 수 있었던 그 시절과. 

앨범이 저렇게 얼마 없었던가. 손바닥만한 미니앨범 세 개가 다였고, 그나마도 딸과 나의 사진이며 부인의 작품을 함께 했던 스텝과 배우들의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세 개 중 하나는 연극의 타이틀과 장면들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부인의 사진을 찾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성호는 사진이 어딘가 더 있지 않을까 해서 붙박이장을 열었다. 분명 아주 오랜만에 들여다 본다고 생각했는데,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제일 윗 찬장에 아내의 가방이 두어개 떨어질 것 같은 모양으로 기대 있었다. 계속 저런 모양으로 있었다면 언제라도 떨어지고 남았을 거다. 예진? 딸? 조조? 분명 셋 중 하나가 이 방에 들어 와 찬장을 뒤진 걸 테다. 뭘 위해서? 옷장 위를 뒤지는 데도 의자를 놓아야 하는 왜소한 딸의 뒷모습을 힐끗 보았다. 

"그런데 왜 그랬니?"
"뭘?"

대뜸 생각나는 데로 물었지만, 앨범에 고개를 박고 되묻는 딸의 물음에 되려 성호가 입이 막혔다. 

"차 그은 거. 열쇠로 그었다며."

어디선가 창작에 쏟을 열정이 제대로 소비되지 않으면 훌륭한 거짓말쟁이가 될 수 있게 된다는 글을 보고 웃은 적이 있는데, 내가 딱 그 짝이다.

"나도 잘 모르겠어."

여전히 앨범을 뒤지고 있었다. 고작 반뼘도 안되는 앨범 두 개를 5분이면 다 살펴볼 수 있을 텐데도, 넘긴 페이지를 또 넘기고 또 넘겼다.

"아빠 근데 사실 나 사귀는 사람 있어."
"어?"

이건 또 의외였다. 

딸 은 아내와 이 집에 함께 살 때부터 나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성호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아내는 두 손 두 발 들고 반대했다. 어디서 여자 혼자, 이런 건 아니었다. 나가 살면 외로울 거라고, 집에 누군가가 있는 것과 없는 건 아주 다른 거라고, 차근차근 설득했다. 성호는 딸과 아내가 서로를 설득해야 하는 대치 상황에 처하면 으레 방에 처박히거나 밖으로 나가버리곤 했다. 그래서 그 대화가 어떤 결말로 치달았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부엌에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에 성호는 제 이름이 몇 번 튀어나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이 없자, 3년 전의 이맘 때, 딸은 성호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원룸을 얻어 나갔다. 성호는 말리지 않았다. 반대해야 할 이유도 몰랐고, 둘이 함께 있으면 침묵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비겁해지는 선택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바락바락 나가 살겠다고 할 만큼 자유를 누리고 싶은 딸이 연애 한 두 번 쯤 하지 않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성호는 딸이 먼저 그 얘길 꺼낼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군데?"
"그게..."

딸은 애꿎은 앨범만 또 몇 번째 새로 펼쳐서 한 장 한 장 넘겼다. 옷장 앞의 의자를 가져와 앉아 대답을 기다렸다.

"내가 아는 사람이야?"
"응."
"누군데?"
"아빠! 왜 그렇게 용의자를 취조하듯 해? 내가 무슨 큰 잘못한 건 아니잖아!"

딸이 잘못한 건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누구냐고?"
"누구면 어쩌게!"
"너 정도면 어디 좀 번듯하고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야지, 어디 놈팽이를 만나는 건 아닌지 알아야 겠다."
"아빠도 아줌마 만나잖아! 엄마 죽고 한 달도 안 되서부터 자꾸 얼쩡거리더니, 나 나가고 나서부터는 집에도 들락거리잖아!"

딸이 예진이를 썩 좋아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그렇게까지 불편해하고 신경쓰는 줄은 몰랐다. 

"자꾸 아줌마, 아줌마 할래? 너랑 나이 차이 나봐야 10살 남짓인데. 예의있게 굴어라."

성호는 잔소리를 섞어 어물쩡 대화를 피했다. 어른들은 때때로 비겁하다. 어른들이 가끔 대화의 맥락도 없이 예의를 운운할 때는 불편한 화제가 나오거나, 저보다 어린 사람이 저에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이야기를 할 때다.

"예의?"

여전히 눈은 앨범에 꽃고 있었지만, 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내 불똥은 과거로, 과거로, 4년 전으로, 그리고 그 전의 과거로 튀었다.

" 근데, 우린 도대체 지금 와서 사진은 왜 찾는데? 뭐? 그 아줌마를 존중해? 내가 존중이 뭔지 어떻게 알겠어, 아빠. 나는 아빠가 엄마한테 먼저 얘기를 거는 것도 언제 본 게 마지막인지 까마득해. 아빠가 엄마를 얼마나 없는 사람 취급했는지 알아? 우리가 사진 찍은 적이나 있어? 사진기 들고 어딜 나가본 적이나 있어? 지금 와서 찍은 적도 없는 사진을 찾으면 그게 어디서 튀어나올 것 같아? 그래, 내가 엄마를 죽였어. 근데, 또 누가 알아? 아닐 수도 있어. 자살한 걸 수도 있어. 아빠, 아빠가 죽인거야! 아빤 정말 내가 봐도 너무했어. 어떻게 사람이 그래?"

어떻게 사람이 그래? 언제 들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예진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같은 이야기를 여러번 듣게 된다면, 정말 아주 잘못한 게 있는 것일 텐데도, 성호는 같이 화를 냈다.

"네 엄마가 얼마나 외로워하는 지 알았으면 너나 잘해주지 그랬어! 그래, 니네 엄마 나 때문에 그 먼데까지 가서 뛰어내렸을 거다. 이제 속이 시원해?"

오랜만에 한 거창하고 긴 대화는 언성을 높이고 얼굴을 붉히는 것이 되었다. 

"사실 내가 죽였어! 내가 그 여자 숨 막히게 굴어서 산 꼭대기까지 기어들어가서 뛰어내렸다고, 니네 엄마!"

둘은 분노를 가장해 발바닥 아래까지 가라앉아 있던 묵은 감정을 독하게 쏘아냈다. 서로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로 쏘아붙이는 이 놀이는 뒤끝이 떫었다. 딸이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한 쪽 다리를 오므려 안았다. 

"아빠, 조기석 아저씨가 음성 남겼더라."

울컥 속에서 치민 것들을 애써 삼키다가 딸은 상관도 없는 연출 얘길 꺼내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또래에서도 키가 커서, 늘 많이 자랐다는 생각만 했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 참 작았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가 쉽게 나오지 않아, 딸이 우는데도 성호는 그 앞에서 석상처럼 우뚝하니 서 있었다.

"근데..."
"어?"
"그, 자꾸 네 엄마 죽였다는 소리, 거 뭔소리냐, 도대체."

딸은 울다 말고, 이상한 눈초리로 성호를 올려다 보았다.

"아빠... 기억 안나?"
"뭐?"

성호는 머리가 어지러워 손을 뒤로 뻗었다. 경대에 기대고 서서 천천히 몸의 중심을 찾았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그 때가 언제였더라. 
성호는 기억을 더듬었다.

"태르르르릉!"
"여보세요." 성호는 양치를 하다 말고 칫솔을 입에 물고 전화를 받았다.
"이소정씨 보호자 되십니까? 여긴 춘천시 봉화지구대 파출소입니다."
"네."

무 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안 가득 치약 거품이 부글거렸다. 경찰소에서 오는 전화를 받아보긴 난생 처음이었다. 아내며, 나며 운전면허조차 없었고, 매일 하얀 백지와 씨름하는 게 일이라 집 아니면 사무실, 아니면 극단, 가끔 외식을 하는 정도가 외출의 전부였다. 불안함이 거북하게 입안 가득 느껴졌다.

"이소정씨께서 오늘 봉화산에서-"

나머지의 말들은 귀에 와 들리지 않았다. 성호는 칫솔을 들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섰다.

119 가 신속히 출발했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로- 목격자는 없고- 비명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여긴 한 등산객이- 개나리색 바람막이가 눈에 띄어- 제보를 할 수 있었- 현재 병원 영안실에 시신을 이송- 시간이 되시는데로 확인하러- 신분증- 

무슨 말을 해야 좋았을까.

성호는 맨 바닥에 치약을 뱉고 칫솔을 집어던졌다. 화를 내야 할 이소정씨는 영안실에 계시다지 않는가. 뭐가 문젠가.

침묵이 불편했을까.
경찰은, 아니,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은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침통히 말하더니 성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성호는 서둘러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모 든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느리게, 느리게, 느리게, 느리게, 느리게. 천천히 기어가듯 싱크로 가서 입을 헹구고, 더 천천히 걸레를 가지고 와 마루를 닦고, 그보다 천천히 어디엔가 세차게 부딪혀 두 동강이 난 칫솔을 줍고, 바닥에 길게 엎드렸다. 웹에서 흔히들 즐기는 '시체놀이'처럼. 

장난전화는 아니었다. 사실인 걸 알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그 비참한 사실이 일상으로 기어들어오지 못할 것 같았다. 미루자, 그래, 천천히 하자. 

오늘 아침에 그녀의 얼굴이 어땠더라. 잘 떠오르지 않았다. 표정이 어땠더라. 아니다, 오늘 아침엔 그가 깨우지 말라고 해서, 얼굴을 못 보고 그녀는 외출했다. 어제는 어땠더라. 잘 떠오르지 않았다. 표정이 어땠더라. 

성호는 길거리가 잘 보이는 창이 큰 까페에 앉아 몇 시간이고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하곤 한다. 어떻게 그걸 잘 써먹을까, 어떻게 사람들의 행동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까.

그런데, 제 마누라가 저에게 어떤 얼굴을 보였는지, 어떤 표정을 보였는지, 아주 새까많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신기했다. 이렇게나 무심할 수 있다니. 그녀에게. 아아.



그 뒤의 기억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부검은 하지 않기로 했다. 경황없이 등본을 떼고 사체검안서를 받았다. 발병일시 란은 비어 있었다. 사망의 종류가 여러가지 늘어서 있었는데, 불의의 추락과 자살, 그리고 타살 세가지 항목 중에 불의의 추락에 체크가 되 있었다. 얼마나 편리한가, '불의'의 추락이라니. 

이소정씨는 영안실에 침착한 표정으로 누워 성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을 잘 탈 줄도 모르면서 굳이 나에게 말도 하지 않고 산에 간 이유가 뭘까. 본인이 맞습니까? 에 네, 하고 대답하자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그녀의 죽음을 향해 치달았다. 장례식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누가 왔다 누가 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성호는 제가 그 때 깨어있었는지, 딸에게 그녀의 죽음을 어떤 표정으로 알렸는지, 딸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 때는 고등학생이었던 딸이, 교복차림으로 그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만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빠, 엄마가 자살한 거야?' 아니야. 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정말 '아니야'일까.  
딸은 그 뒤로 다시는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지만, 성호는 알고 있었다. 서로가 '아니야'를 불신하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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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신기하고 편리해서 올려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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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감도>를 보면서 생각나는데로 휘갈긴 단상들이다. 후에 써먹을 데가 있으면 좋겠다.
영화자체는 5개중 하나정도의 단편만 괜찮았으니 별로였지만, 막혀있던 생각을 진행시킬 용도로는 좋았다.
영화 내용과 관계있는 내용보다, 없는 내용이 더 많다.
그냥 그 때, 커피를 과다복용해서 좀 하이상태였던 탓에 쓸데없이 낙서가 많았다. 생각난 김에 이제서야 워드로 옮긴다.

 1.여자가 남자의 떨어트린 물건을 주워준다. 장소는 공중전화나 우체통 앞 정도. 비웃음같은 미소로, 칠칠치 못하다는듯이. 저기요. 이거 떨어트리셨는데요. 막상 여자가 떠난 후에 그 여자가 흘린 물건이 그 자리에. 보통은 잘 흘리지 않을법한 물건이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걸로 하자.

2.아, 나는 대화의 기본이 안되어 있는 놈이다. 의문형으로 끝내기?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나는 자신만만할만한 당당한 근거가 있었다. 주관적으로 그건 아주 합당하고 그럴듯한 근거였다. 하지만 이런 도전적인 상황에 처한 건 이게 처음으로, 나는 내가 생각했던 그 근거가 아주 안일한 상황에서 쉽게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된다.

3.아니다. 나는 경제전공이라거나/교양이라거나/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기회비용을 생각하자. 어리석게 충동적으로 이러면!

4.일상의 모든 마주치는 매력있는, 사람이, 매력있는 사람이, 타인의 행복한 정황에 '그 사람'을 대입한다.

5.내마음이 내마음을 내마음대로 못하게한다. - 하지말자. 그만두자. 그게 이롭다.
이 놈의 몸뚱이는 머리와 연결되어 있긴 한거냐? (하지말자고 결심하는 순간 행동하고 있는 내 손/입/말/아무거라도)

6.중요한 건 내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이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지느냐 하는 것이다.
나의 일상의 지루하고 외로운 부분은 집어놓고 두드러지고 부각되는 부분을 마치 일상의 전부인냥.
그만큼 이 사람에게 잘보이고 싶었다.

7. 아무 근거없이, 처음 만난 사람을 상대로 보이는 것들을, 배경지식을 근거로 한 가지씩 캐치해서 상대방의 배경/현실/지금/취향/취미를 맞추는 놀이. 번갈아. 틀리면? 벌칙은 가혹할 수록 좋다. 

8.그 사람의 방을 관찰할 기회가 생긴다. /스토커같은 이미지로 만들지는 말고, 호기심백배 소년소녀같은이미지로/
뒤지는데 재미가 붙는다.  그만둬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9.그녀와 잘 수 있는 게 좋은 게 아니라, 그녀와 잘 수 있는 사이인게 좋은거라면, 나는 지금 사랑하고 있다고 할 법 하다.
(요건 오감도 발췌. 토씨는 모르겠다.)

10.여자를 찾아 방 안을 돌아다니는 남자. 카메라와 시선이 겹치지 않게, 남자 뒤를 쫓는다.

11.가끔 내가 먼저 그에게 머리를 말려달라고 요구하거나, 귀찮을 법한 행동을 해 달라고 굳이 떼를 쓰는 건, 내가 그 일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 일이 그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래서다.

12.자꾸 벽장에 숨는 여자. 멀쩡한 집을 버려두고. 벽장에 있는 이불을 죄다 꺼내놓고. 제가 이불인척. 거기 그렇게.
(이유가 안나오면 그냥 호러스럽고 허세돋는 서술이 될 뿐이니까, 이걸 써먹고 싶다면 여자의 심리에 이유를 만들어줘야함)

13.집에 들어올 때마다 습관적으로 숨바꼭질하는 부부. 어느날 정말 찾을 수 없게 된다. 매일 그렇게 숨더니 이제 너무 잘 숨어서, 내가 찾을 수가 없네. 텅 빈 집에서 크게 고함을 지르고 울기 시작한다. 허함.

14.지루하게 인간을 괴롭히는 게 있다. 나는 어느 시점에서부터, 태어날때부터 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불량품이었다. 병원의 말로는 그냥 B형감염의 항체가 조금 부족할 뿐이라고 했지만, 원래 그렇게 무언가가 부족하거나 결여된 걸 불량품이라고 하는 거잖아.

15.자기 스킨은 가져갈래. 보고싶을 때 냄새맡게. 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건데, 뭐. 
그녀는 그때부터 이미 길고 긴 싸움을 예감하고 있었던거다. 난 그녀가 죽고나서야 그 일을 떠올렸다.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내가 배신할 거라는 걸, 3년 전에,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고, 그러면서도 나를 원망하지 않은 거다.
잘 꾸며진 내 새 가정이 갑자기 역겹게 느껴졌다.

16.겨우 혼자를 견딜 수 있게 되었을 때 돌아오지마. 

17.이번에 다같이 성묘를 가기로 했어요. 저, 혹시 위치가?
그냥 화장했어요.
나는 내 목소리가 화를 내는 것처럼은 느껴지지 않기를 빌었다.

18.그녀의 향수 뚜껑을 열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왜 냄새는 다른 것들에 비해 이렇게나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일까.
냄새는 지독히도. 그 어떤 냄새도. 단 한 번 맡은 냄새조차, 쉽게 기억하고 있다가 후에 같은 냄새를 맡게 되면 잽싸게 뇌에서 구분해준다. 이건 어느때 맡았던 그 냄새야, 라고.
정말인 모양이었다. 지워지지 않았다.

19.병원에서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늘 그렇게 물었다. 언제 내가 제일?

20.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늘 그렇게 함께 모든 걸 시작하고 끝나는 건 이상하잖아. 그렇다면 그건 언제 끝나는 걸까? 적당한 선에서? 연기로? 상대에게 맞추는 척 하며?

21.그는 나 때문에 죽었다. 후에 장례를 치룬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자리에서 꼬장꼬장한 그의 할머니가 마당까지 달려나왔다. 꺼져버려, 하면서 내게 뼛가루를 집어던지는데, 이게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고마웠다.
(이건 좀 그로테스크하지 않게 처리해야할듯)

22.집에오자마자 침대에 누워 아무 끈이나 닥치는데로 붙잡고 내 목을 졸랐다. 울다 지쳐 목이 졸리는데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있는 힘껏 양 손을 잡아당겼다. 꺼억꺼억 짓눌리는 느낌이 기분나빴다. 아, 아, 죽을 수 있어. 
정신이 들어보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양 손에 시뻘건 자국이 남아있었고, 목도 가는 끈에 졸린 자욱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기절했다 깨어난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싫어, 싫어, 다 싫어, 내 몸에 수분이 얼마나 있는지, 분명 더 이상 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을 하다가도 고개를 들면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한 시간을 넘게 그 자리에 앉아 울었다. 억울했고, 그리웠다. 이젠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는 실감은 없는데도 이렇게나 벌써 그리웠다. 눈을 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가라앉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건, 내 마음 속 뿐,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23.의미없이 아름다운 문장은 쓸모없이 잘 짜여진 짧은 영상미와 같다. 아름답고 신선하지만 거기에 감동은 없다.
내가 요즘 쓰는 게 그런 것 같다. 의미를 찾자. 받쳐줄 건, 탄탄한 전제와 강하고 살아있는 캐릭터다.

24.죽음을 슬퍼하기에 앞서 이 분노에 먹이를 줘야만 했다.
그의 마지막 여자를 몰아세우고 물어뜯었다. 달리 도망가려 들지 않는게 더 무섭고 얄미웠다.

25.그만두자고 생각했을 땐, 그 아이가 나의 벌을 다 받고 나면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알게된 순간이었다.

26.내가 대신이 되고 싶었는데. 안되는 거구나. 정말 그 사람 사랑했구나? 내가 재밌는 걸 보여줄게.
등가교환이, 아주 쉬운 숫자놀음이 어떤 건지를 보여줄게.
그렇게 말하고 아이는 조용히 물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머리가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 어쩐 일인지 그 사내가 물 밖으로 그 자리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죽었을텐데. 분명.

27.밝고 경쾌한, 피아노가 통통튀는 음악/뭔가의 기분좋은 시작의 예감. 기차로 출발하고.
왔어?하고 돌아보는 얼굴이 거기에 있다. 

28.이 사람에게만 말할 수 있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만이 나를 이해해줄 거라고.
그 사람을 데리고나와 나의 상황에 개입시켰다.
"난 네가 이해가 안된다. 도무지."
작고 사소한 한마디지만, 이걸로 난 전세계의 그 누구에게도 이해 받을 수 있으리란 희망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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