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로 휴가를 떠난 어머니와 집에 함께 남게 된 두 명의 형제. 승승장구해온 고지식한 성격의 시나리오 작가인 동생 오스틴, 사막을 헤매이고 다니던 방탕한 방랑자 형 리. 여기에 얼마만큼의 등장인물을 더하느냐 빼느냐가 좀 더 스토리에 굴곡을 줄 수는 있겠지만, 너무 뻔한 형제간의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런 예상을 크게 뒤집지 못하고 형제간의 갈등양상도 아주 진부적인 요소들로 점철된다.
동생은 형의 자유로운 모습을 닮고싶어하고, 형은 동생의 엘리트 가도를 부러워한다. 하지만 둘은 그 사실을 서로 모른다. 이런 진부한 설정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하나의 새로운 요소는 형이 동생의 일에 끼어들어, 동생의 작품을 뒤엎고 자신의 시나리오를 성공적으로 쓰게 한다는 것이다. 사울이라는 제3의 등장인물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동생은 자신이 그동안 매진해왔던 프로젝트를 형에게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나갔더라면 그나마 갈등양상이 확연하게 드러났을지도 모르지만 이야기는 점점 이상하게 치닫는다.
크게 아쉬웠던 설정은 세 가지 정도가 있다.
첫번째는, 동생의 영역을 침범한 형 리의 시나리오에 관한 것이다. 사울에게 '정말 훌륭한 다시는 없을 시나리오. 그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평가 받을 만한 것이었고, 계속해서 형 리가 한 탕을 해보려고 하는 소재가 되는 것이 이 시나리오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쓰는 장면이 나옴에도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나서도 그 결과는 불투명하다. 조금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었을까.
두번째는, 아버지에 대한 것이다. 극의 처음부터 동생 오스틴은 아버지에 대한 화제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못견뎌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형 리는 아버지를 모셔오겠다며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드러난 실상은 그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방랑자인 형은 잘 모르는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동생에게서 듣게 되고, 형제는 함께 눈물을 흘린다. 지나치게 신파극적인 요소로 몰고가려는 것이 갑작스러워서 어울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계속 언급되는 것에 비해 형제와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묘사된다. 아예 빼버리거나, 아니면 아예 좀 더 자세하게 다루었어야 할 것 같다.
세번째는, 어머니에 관한 것이다. 극 중에서 어머니는 남자 배우가 연기하게 된다. 연출가와의 대화 시간에 연출가께서 '좀 더 불편한 느낌을 주려했다'고 말씀하신 부분은 아주 잘 실현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전체 장면 중에 일부의 장면을 잘라낸 탓인지, 폭력을 당한 트라우마를 가진 여성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는 단서 자체가 너무 적다. 아예 그런 요소를 빼버리고 형제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트라우마를 가진 여성이라는 설정을 관객이 이해할 수 있게 했어야 옳다.
번역을 시키는 것도 다 글을 잘 쓰게 하기 위한 일환의 수련이 아닐까 하는 망상이 들었다.
필사를 왜 하는지 알 것 같다.
필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였는데,
본의 아니게 문장 하나하나를 쥐어뜯으며 읽은 책이 - 번역한 책이 - 몇 권째가 되어가는데,
걔중에서는 단편도 있고, 또 장편도 있고, 아이들을 위한 책도 있었다.
장편은, 정말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씌어진다기 보다, 그냥 재미를 추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씌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주 소소한 곁가지가 잔뜩잔뜩. 분명히 섬에 난파한 이야긴데 섬에 도착하기 전까지가 책의 1/4일만큼 곁가지가 잔뜩잔뜩. 읽을 땐 모르겠지만 이걸 옮기고 있자니 지치는 이야기다.
하지만 역시 이런 걸 잘썼다고 하는 거겠지. 곁가지 잔뜩잔뜩.
좀 부정적인 말로 달리 말하면, 포인트를 잃어버린 느낌이기도 한데 말야.
아 진도가 안나간다. 빨리 끝내버리고 내 글을 쓰고 싶은데.
자료만 잔뜩 빌려놓고, 생각보다 번역이 늦어지니까 연체료만 생길 판.
읽기는 로맨스를 잔뜩 읽어놓고, 쓸 때는 로맨스를 안쓰겠다고 버튕기는 내가 웃기다' ㅅ'-3
내가 발췌해놓은 발췌문구들을 찾기가 너무 귀찮아서, 예전 블로그에서 끌어왔다. 너무 기니까 접어야지.
섀도우 - 미치오 슈스케.
p.98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알아. 내 사고에는 바이어스가 걸려있다.... 그런 의미겠지?" "그래, 맞아." 바이어스란 왜곡 혹은 편향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다. 사고에 바이어스가 걸림으로써 사람은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실물을 보지 않고 동전의 그림을 그리게 했을 때 유복한 집에서 자란 아이는 실제보다 작게 그리고 빈곤층 자녀는 크게 그린다. (중략) 확증 바이어스는 어떤 사람이 뭔가를 확신하고 있을 때 생긴다. 그 사람은 주위의 정보 중에서 자신이 믿고 있는 정보만 모으려고 하고 반대로 반증이 되는 증거의 수집은 피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결과적으로 사물에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된다.
요노스케 이야기 - 요시다 슈이치.
p.39 "화라는 건 말이다. 결국은 타인에게 뭔가를 바라기 때문에 생겨나는 거야." "타인에게 뭔가를 바라고 그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화를 낸다, 그건 하찮은 속물일 뿐이지. 게다가 화는 아무런 도움도 안 돼. 그저 공평한 눈을 잃어버릴 뿐이지."
집오리와 들오리와 코인로커.
p.220
나는 완전히 주인공인것처럼 살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의 인생속에서는 단역에 불과하다. 그런 사실을 지금 와서 겨우 깨닫는다.
가와사키들의 이야기 속에, 나는 나도 모르게 끼어든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얼빠진 구석이 있으니 말이다.
p.221
"자는데 깨웠어?"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조심 방에 들어온 그는 이불에 누워 있는 나를 보자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 아이스크림을 먹는 꿈을 꾸던 참이야."
나는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가서는 냉장고 안에서 컵 아이스크림을 두 개 가져와 도르지에게 하나 건네주었다.
"고토미는 꿈을 현실로 만들었어. 굉장한데."
도르지는 그렇게 미소 짓고는 컵을 테이블에 놓았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
p.105
하루에 두 남자의 눈물을 보다니, 무슨 날이 이렇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지그마지 루트가 우는 모습은 수도 없이 보아왔다. 젖달라 안아달라 울고, 짜증을 내며 울고,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울었다. 하기야 루트는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울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과거에 봤던 눈물과 달랐다. 눈물은 내가 아무리 길게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곳에서 흐르고 있었다.
p.117
물론 의미는 알 수 없었다. 각 페이지에 숨겨진 수수께끼느 어느 하나 공유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하염없이 노트를 쳐다보고 싶었다.
연애중독
p.61
소년같은 정열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게 소년 같은 외로움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떄, 노리코는 자신이 먼저 경계선을 넘어갔다.
p.71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긴 해도, 그걸 딸의 입으로 듣는 것은 쇼크인지도 모른다.(중략) 그러나 자신에게 기대고 싶어하는 아버지와 엄마를 밀쳐버리고 싶은 마음 쪽이 후회보다 강했다.
p.139
세간에서의 이해관계와 상반되는 데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사랑에 이끌리는 것이다.
p.229
간단히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것에 까닭도 없이 화가 났다. (중략) 뭔가를 받고, 뭔가를 해주는 게 아니라 (중략) 상처받고 상처입히기도 하면서 잊을 수 없게 되는 것. (후략)
p.268
"로스트로포비치가...... 박수를 쳐주었대.... 연주가 끝나자마자."
2권
p.100
불과 조금 전 떨쳐버린 사랑이었는데.
p.117
내 발로 걸어가려고 하니 여러 사람들을 상처입히게 돼. 그걸 처음으로 알았어. (중략) 엄마도 상처입혔다. 아버지도. 달리도 알게 모르게 여러 사람들을 상처입혔을지 모른다. 자신도 상처를 입게 되더군. 그가 말했다.
p.197
그때는 그저 무아지경에 있어서 자신의 마음조차 잘 알지 못했다. 연애의 폭풍 속을 무턱대고 달려갔을 뿐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지금은 무아지경에서 연애를 하고 있을 수가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키사에게로 뛰어들겠다는 마음은 지금의 노리코에게 없다. 냉정하게 자신을 보고, 냉정하게 키사도 보고 있다. 무엇이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노리코도 키사도 상대에게 당당히 얘기해 왔다. 그러니까 몇 번씩이나 싸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
p.243
난 지금까지 한번도 내 인생을 사랑한 적이 없어. 아사바는 사랑했지만 아사바를 사랑하는 내 자신은 사랑할 수 없었어.
아야가 하는 말을 노리코는 이해할 수 있었다.
쓸쓸함의 주파수 - 오츠 이치
그것은 내게 후회로 남았다. (중략)
그렇지만, 나는 생각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불행한 면 까지도 그리워하면 된다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p.60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 온다 리쿠
요컨데 '난해함'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더해진 것이다. 난해함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권위와 논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기 힘든 페로몬을 발산하는 듯하다. -p.48
문득 목덜미 뒤에서 뭔가가 꿈틀대는 감촉이 느껴졌다. 익숙하고 친근한 정겨운 감촉이다. 이런 순간은 항상 갑자기 찾아온다.
다나베세이코의 에세이였던가. 이런 느낌을 두고,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 같은 감각, 이라고 했다. 손을 내밀어 살짝 고양이를 쓰다듬으려 하지만 항상 잽싸게 달아난다. 지금 당장 그곳에 아이디어가 있는 것은 알지만 섣불리 솓을 뻗으면 사라져 버린다. 고양이가 그 곳에 있을 때는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고양이 따위 신경쓰고 있지 않은 듯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슬그머니 다가가는 것이다.
그는 고양이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가까이 있다. 아주 가까이. 아름다운 고양이가.
p.59-60
남자는 마음 한구석에서는, 과거의 여자는 모두 자기 것이고 모든 여자가 틀림없이 자기에게 미련을 갖고 있다는 환상이 있기 때문에 옛 여자가 '만나고 싶다'고 하면 주저없이 만나러 가기도 하지요. (중략)
여자는 미래를 살아가는 동물이니까. 그녀들에게 옛 남자는 어차피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 과거거든. 실제로 그런 여자들을 보면 정말 잊어버리더군. 재조정 정도가 아니고 아예 기억에서 말소당하는 거야. 우리 남자들은.
p.80-81
남자들은 오해를 하곤 하지. 이 정도의 여자라면 나도 감당하겠구나 생각하는 것 같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말을 걸기 때문에 그녀 스스로도 오해를 하게 만드는 거지. 그런 여자의 자만심은 대단해. -p.122
(전략) 이렇게 되면 역까지의 길을 되돌아가서 꼼꼼히 찾는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고 우산을 펼쳤더니 찰랑 하며 열쇠가 떨어졌다. 이 장면 어딘가에 사용할 수 없을까. -p.129
제복이라는 건 참 편리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것을 입는 순간 머리는 일에 대한 생각으로 바뀌고 같은 일을 하는 다른 동료와의 연대감도 생긴다. 그리고 무엇보다 편리한 것은 그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p.243
밖에서 책을 읽다 보면 늘 이상한 심정이 된다.
밖에서는 항상 시간이 흐르고 풍경이 변화한다.(중략) 마치 강물에 나무토막을 꽂은 듯이 혼자만 물결을 거슬러 멈춰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는 것이다. (중략) 그런 느낌의 정체가 자신의 정신 활동이라고 생각하면 육체란 얼마나 무방비 상태로 외계에 노출되어 있는가 싶어 놀랍다.
어느새 몸이 조금씩 젖어들고 있었다. -p.312
나는 이 줄리엣의 순진함이 부러워요. 그보다 오히려 얄밉다고 해야겠지만. 첫사랑에 들떠서 그 사랑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자신이 믿는 사람을 위해 죽어 가요. 그 어리석음이 얄미워요. 자신이 순수하다고 여기는 오만함이 미워요. 사랑이 끝났을 때의 환멸이나, 살다가 느끼는 권태도 알지 못하고. (후략)
p.365
중력의 법칙 - 장 튈레
여자 집배원은 당장 얼굴부터 감싸더니, 그 살인자의 손 안에다 울음을 터뜨린다. -p.61
이봐요 코르네유 선생, 이 어인 기막힌 상황이란 말이오. 이거야 말로 국가의 논리와 가슴의 논리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기는 상황이 아닌가. p.137
목요조곡 - 온다 리쿠
40대 중반이지만, 여자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여자가 여자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을 당연하게 해내는 여자와 노력이 필요한 여자가 있다. 시즈코는 보기와는 다르게 영리하고 터프한 여자라서, 노력도 하고 있겠지만 그녀의 회로에는 그 에너지가 원래부터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리코는 다르다. 아름다워지는 기쁨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워지고 싶다고 바라기도 하지만, 그것에 에너지를 쏟을 만한 회로가 자기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 그것은 금새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 목요조곡 p.12
티티새 - 요시모토 바나나
p.55
군대의 본질이야말로 계속해서 한 놈이 딴 놈에 대해 권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 하사관은 졸병을, 중위는 하사관을, 대위는 중위를 머리가 돌아 버릴 만큼 못살게 굴고 있단 말이야. 아랫사람에 대한 권력 행사에 쌍방이 다 익숙하게 되지.
p.99
좌우간 우리들은 모두 곤란을 당할 거야. 대관절 고향에서는 그런 것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2년 동안의 사격과 수류탄 던지는 것 - 그런 습관을 양말 벗듯이 벗어 던질 수는 없지 않느냐 말이야, 시간이 흘러도...
p.231
용서해 다오, 전우여. 어찌하여 자네가 내 적이 되었단 말인가? 우리가 이놈의 무기와 군복을 벗어 던지고 자네도 카트와 알베르트와 같이 내 동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게서 20년의 수명을 가져가 다오, 전우여. 그리고 일어서라. 내게서 많은 세월을 가져가 다오. 어차피 나는 그것을 어떻게 써먹으면 좋을지 모르니까.
p.270
만일 우리가 어느 날, 일어나서 그들 앞에 나가서 해명을 요구한다면 우리의 아버지 세대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전쟁이 없는 때가 온다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중략) 인생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p.277
우리는 먼저 사병이며, 그 다음 뒤늦게야 창피하게도 가까스로 개개인의 인간이었다.
p.279
이렇게 우리는 극단적이고 피상적이며 폐쇄된 딱딱한 생존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p.282
우리는 포위당했다. 항복하기가 어려웠다. 안개가 우리 위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항복하려고 한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챌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우리들 자신이 항복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순간에는 자기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는 법이다.
p.283
개를 처치하려던 베르거는 골반에 총상을 맞고 운반되었다. 그를 운반하던 사람들 중의 하나는 정강이에 총을 맞았다.
p.289
휴전과 평화가 올 것이라는 맹렬하고도 자극적인 풍문이 떠돌았다.
p.290
우리들의 손은 대지요, 육체는 진흙이며, 눈은 빗물의 웅덩이였다. 우리는 우리가 아직도 살아 있는지 아닌지를 알지 못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 레마르크
p.55
군대의 본질이야말로 계속해서 한 놈이 딴 놈에 대해 권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 하사관은 졸병을, 중위는 하사관을, 대위는 중위를 머리가 돌아 버릴 만큼 못살게 굴고 있단 말이야. 아랫사람에 대한 권력 행사에 쌍방이 다 익숙하게 되지.
p.99
좌우간 우리들은 모두 곤란을 당할 거야. 대관절 고향에서는 그런 것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2년 동안의 사격과 수류탄 던지는 것 - 그런 습관을 양말 벗듯이 벗어 던질 수는 없지 않느냐 말이야, 시간이 흘러도...
p.231
용서해 다오, 전우여. 어찌하여 자네가 내 적이 되었단 말인가? 우리가 이놈의 무기와 군복을 벗어 던지고 자네도 카트와 알베르트와 같이 내 동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게서 20년의 수명을 가져가 다오, 전우여. 그리고 일어서라. 내게서 많은 세월을 가져가 다오. 어차피 나는 그것을 어떻게 써먹으면 좋을지 모르니까.
p.270
만일 우리가 어느 날, 일어나서 그들 앞에 나가서 해명을 요구한다면 우리의 아버지 세대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전쟁이 없는 때가 온다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중략) 인생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p.277
우리는 먼저 사병이며, 그 다음 뒤늦게야 창피하게도 가까스로 개개인의 인간이었다.
p.279
이렇게 우리는 극단적이고 피상적이며 폐쇄된 딱딱한 생존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p.282
우리는 포위당했다. 항복하기가 어려웠다. 안개가 우리 위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항복하려고 한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챌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우리들 자신이 항복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순간에는 자기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는 법이다.
p.283
개를 처치하려던 베르거는 골반에 총상을 맞고 운반되었다. 그를 운반하던 사람들 중의 하나는 정강이에 총을 맞았다.
p.289
휴전과 평화가 올 것이라는 맹렬하고도 자극적인 풍문이 떠돌았다.
p.290
우리들의 손은 대지요, 육체는 진흙이며, 눈은 빗물의 웅덩이였다. 우리는 우리가 아직도 살아 있는지 아닌지를 알지 못했다.
흑과 다의 환상 - 온다 리쿠
上권
p.25
분명히 다들 그럴테지.
(중략) 그런데도 죽는 순간까지 아직 멀었다. 아직 나한테 그 날이 올 리가 없다, 하고 생각할 테지.
p.100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설명하지 않는다. (중략) 말이란 서비스고, 대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다.
p.110
그래서 붉은 여왕 가설인거야. 생명의 전략에 '적당히'는 용납되지 않아. 늘죽을 각오로 싸워야 하는 거야.
(중략) 그런데 제 3의 생명체는 어떠냐. 남자든, 여자든 될 수 있어.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이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가 함정인 거야.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잖냐? 인간도 당연히 쉬운 방향으로 가게 마련이야.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라는 건 선택을 저버렸다는 이야기야. 그 시점에서 이미 전선 이탈해 버린 거지.
p.161
만남에 순서는 있을까.
행복할 때는 사고가 종종 똑같은 패턴에 빠지기 쉽지만, 불행해지면 실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下권
p.88
자기혐오는 하지 않기로 하고 있다.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고,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에 몇 번은 자기혐오 쪽에서 제멋대로 나를 찾아온다. 그쪽에서 안 올거면 이쪽에서 가주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거침없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내 안에 털썩 주저앉는다.
영원한 것은 없다 - 로랑스 타르디외
p.12-13
난 마음속에서 이윽고 우리를 떠나보냈다고 생각했다.
우린 상처를 입게 될 거야, 주느비에브. 네가 곧 이곳을 떠날 거라면 왜 굳이 상처를 건드려야 할까? (중략) 밤은 더는 무언가를 찾아 헤메는 시간이 아니니까.
한데 난 너를 향해 가고 있어. 네 편지를 읽자마자 미처 웃옷을 꿰어입을 생각도 못 한 채, 도둑처럼 너를 향해 달려가고 있단 말이다.
p.22
난 스물하고도 몇 해 지난 나이이고 삶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하지만 이날 저녁만은, 사랑과 영원이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지를 깨닫는다.
.
p.66
기억에 새겨둘 것. 우리에게 기쁨이 존재했음을, 의심하지 말 것.
남자들에게 - 시오노 나나미
p.20
남자들 중에서 귀찮아서 멋부리지 못한다고 변명하는 사람을 본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런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충고하고 싶다. 왜냐하면 귀찮다는 말은 멋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고, 감수성이나 호깃심의 결여를 위장하기 위해 쓰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다는 변명과 비슷하다. 나는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지 못한다는 변명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
(중략)
마지막 항으로 넘어가 보자. '천연기념물'이라고 했지만,(중략) '군자는 의복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식의 가치기준이 적용되는 남자가 아닐까 싶다.
이런 종류의 남자는 거의 예외없이 자기 일에 절대적인 자신을 갖고 있다.(중략) 자신은 멋부리지 않지만 상대방의 치장에 대해서, 특히 여자의 아름다운 복장에 대해서는 실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중략)
그러나 이런 남자가 진짜 나쁜 놈이다. 여자들은 가까이 가지 않는 편이 좋다. 우리 여자들이 이런 남자를 굴복시킨다는 것은 어림없는 이야기다. 귀여운 구석이란 조금도 없다. (중략) 이런 남자는 전면 항복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스위스인에게 내가 원한 철자를 기대하는 건 약간 - 아주 약간 -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의외의 철자Spell의 소유자셨다. Alan de Botton이라신다. 받침 ㅇ이 낯설게 다가오는건 내게 문제가 있는 거겠지만. 알랜 드 버튼. 은 이상할까.
아주 끝장을 봐주지. 라고 생각하면서 잡은 그의 후작. 모든 작가가 그렇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작가가 그렇듯이. 어깨 힘 꽉 들어간 책은 봐주기 힘들다. 논문이라도 집대성할 기세로 쓴 교양서는 영 멋대가리가 없다. 그런 이유로. 이제 보통씨와는 꽃잎이 분분히 날리는 결별이다.
p.22
이렇게 흔들린다면 사회의 태도가 우리의 의미를 결정하기 마련이다.(중략) 혹시 남의 애정 때문에 우리 자신을 견디고 사는 것은 아닐까?
p.27
(전략) 그래도 귀중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중략) 어떤 친구나 연인은 우리가 파산을 하거나 수모를 당해도 우리를 모른 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가끔은 그 말을 믿어볼 수도 있겠지), 우리가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속물들의 매우 조건적인 관심이다.
p.74
한 살짜리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부르고뉴의 선량공필리프는 (중략) "만일 신께서 나를 그렇게 일찍 죽게 하셨다면 나는 행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p. 119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의 등장 The Rise of the Meritocracy>(런던, 1958)에서 이렇게 말했다.(중략) "이제는 자신이 열등한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와는 달리 기회를 박탈당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열등하기 때문에 말이다."
p.131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다. 주군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고 그들의 미움을 사도 상관 안 한다. 그저 당신의 주군과 의무를 사랑하며 살 뿐이다. 그래, 그래서 당신이 망한 것이다."_ 라브뤼예르.
p.132
그러나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 사무실이나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3에이커와 오리 대여섯 마리와 자유의 유혹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
p.22
이렇게 흔들린다면 사회의 태도가 우리의 의미를 결정하기 마련이다.(중략) 혹시 남의 애정 때문에 우리 자신을 견디고 사는 것은 아닐까?
p.27
(전략) 그래도 귀중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중략) 어떤 친구나 연인은 우리가 파산을 하거나 수모를 당해도 우리를 모른 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가끔은 그 말을 믿어볼 수도 있겠지), 우리가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속물들의 매우 조건적인 관심이다.
p.74
한 살짜리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부르고뉴의 선량공필리프는 (중략) "만일 신께서 나를 그렇게 일찍 죽게 하셨다면 나는 행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p. 119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의 등장 The Rise of the Meritocracy>(런던, 1958)에서 이렇게 말했다.(중략) "이제는 자신이 열등한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와는 달리 기회를 박탈당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열등하기 때문에 말이다."
p.131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다. 주군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고 그들의 미움을 사도 상관 안 한다. 그저 당신의 주군과 의무를 사랑하며 살 뿐이다. 그래, 그래서 당신이 망한 것이다."_ 라브뤼예르.
p.132
그러나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 사무실이나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3에이커와 오리 대여섯 마리와 자유의 유혹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딱잘라 취향이었다. 반했다.
두목, 인간이란 짐승이에요. 짐승이라도 엄청난 짐승이에요. 그런데도 두목은 이걸 알지 못해요. 당신에겐 이 인간이라는 것, 세상사라는 것이 너무 어려웠던 모양인데(중략). 우리에겐 똑같은 권리가 있다, 이 따위 소리는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당신에게 달려들어 당신 권리까지 빼앗고 당신 빵을 훔치고 굶어 죽게 할 거요. 두목, 좋은 걸 다 걸고 충고하건데, 거리를 둬요! (중략) 안 믿지요.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 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 내어ㅓ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요.
저런 이기주의!
내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두목. 사실이 그러니까. 내가 콩을 먹으면 콩을 말해요. 내가 조르바니까 조르바같이 말하는 거요.
p.86-87 中 발췌.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중략)
나는 아무래도 인생의 길을 잘 못 ㄷ든 것 같았다. 타인과의 접촉은 이제 나만의 덧없는 독백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의 사랑과 책에 대한 사랑을 선택하라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p. 159 발췌.
주교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는 그의 전 생애를 정당화시켜 준 셈이었다.
p. 317 발췌.
저 엄숙하고 고상한 육체 속에 영혼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p.323 발췌.
조르바의 무릎은 천 번하고도 한번 더 난파했던 그 가엾은 여자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한 치의 땅이었다.
p.327
못 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못 했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나는 당신의 소위 그 <신비>를 살아 버리느라고 쓸 시간을 못 냈지요.
p.337
고독을 느낀 순간 나는 일어났다. 왜? 어디로 간다? 나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p.364
내 딴에는 자기 위안의 한 경지에 도달했답시고 한번 과부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조르바는 그 긴 팔을 쑥 내밀어 손바닥으로 내 입을 막아 버렸다.
닥쳐요!
그가 구겨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닥쳤다. 부끄러웠다.
p. 385
부불리나가 살아 있을 동안 말입니다. 어느 카나바로도 나만큼 그 여자를 기쁘게 해준 사람은 없습니다. 이유를 알고 싶어요? 이 세상의 모든 카나바로는 그 여자에게 키스하면서도 자기 함대나, 왕이나, 크레타나, 훈장이나, 마누라나.....이런 걸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걸 깡그리 잊어버립니다.(중략) 자, 유식한 양반. 이 이야기는 하고 넘어갑시다. 여자에게 그 이상의 기쁨은 없는 법입니다.
p.421
얘야. 천당의 일곱 품계도 이 땅의 일곱 품계도 하느님을 품기엔 넉넉하지 않다.그러나 사람의 가슴은 하느님을 품기에 넉넉하지. 그러니 알렉시스야, 조심하거라. 내 너를 축복해서 말하거니와,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내면 못쓰느니라!
p.430
이성은 내 심장에 질서 회복을 명하면서 박쥐의 날개를 자르고 잘라 더 이상은 날 수 없게 했다.(중략) 나는 일상의 현실을 회복했다.
p.458
이 사람에게 영원한 이별을 고해야 한다. 잘 보아 두어야지, 절대로 절대로 다시는조르바에게 시선을 돌리지 말아야지!
P.461
순간 글자가 내 눈앞에서 춤을 추었다. 나는 글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글자가 천천히 제자리를 잡자 나는 읽었다.
P.467
평생에 한 번이라도 그 아름다운 녹석을 봐야 하는 건데, 당신은 보지 않았어요. 젠장. 일이 없을 때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지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그러나 어제 당신의 편지를 받고 나는 두목 가ㅏㅌ은 펜대 운전사에게는 지옥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P.471
잘 보고 죽을 때까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 누가 이분들을 죽였어요?
아버지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자유.
P.481
그 당시에는 발췌할 만한 문구라고 생각했거나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을 지라도,
지금 볼 때 쓰레기다 싶은 건 그냥 귀찮아서 생략했다.
그러고 나서 제목들을 훑어보니 거의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들이다. 대놓고 편애 ㅋㅋ
물론, 이 블로그에 이미 있는 발췌문구들은 귀찮으니까 정리안함ㅋ
진짜 요즘 책 안읽는구나. 옛날이라고 그렇게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발췌해놓는 성의는 있었는데.
옛날, 모 단체에서 홍보를 목적으로 리뷰를 멋대로 퍼가고 댓글 하나 남겼던 기억이 있어서 리뷰는 잘 안쓰게 되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그래도 상관없는 거야? 출처만 명시하면 사전동의를 얻지 않아도 괜찮나?
우리나라는 저작권 알기를 똥같이 아는 나라니까, 거기다 좋은 일을 하고 있으면 무슨 일을 해도 괜찮을거라는 인식이 박힌 나라니까.
뭐, 이렇게 속이 불편할거면 그냥 리뷰를 안쓰면 되겠지만. 계속 떠올라서 어쩔 수 없이 몇 자 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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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결국 재상연의 마지막날에서야 보게 되었다.
양손프로젝트를 처음 접하게 된 <개는 맹수다>이후로 달리 큰 일이 없으면 쫓아가서 다 찾아 본 편인 것 같다. 내가 뭐라고 감히 평가하기는 뭐하지만 <개는 맹수다>와 <ENDGAME>은 꽤 비슷한 느낌이어서 편하고 재밌게 봤던 것 같고, <죽음과 소녀>는 상당한 실험작이어서 배우들이 인사하고 사라지는 순간까지 마음이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연극을 보면서 현진건의 소설을 다시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늘 연극을 볼 때마다 꼬질꼬질하신 남자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제3자의 대사를 던질 때마다 어쩜 저렇게 만화같은 연출일까 생각한다. 솔직히 이 분은 좀 사기성이 짙은 캐릭터인 것 같다. 연기력이 만렙임ㅋㅋㅋㅋ
이들의 연극은 늘 어딘가 낡지 않은 새로운 시도가 보여서 보고 돌아서서 나올 때에도 기억에 남는 묘한 장면들이 있다.
극작을 전공하는 친구가 소도구를 많이 쓰지 않고 연극을 시작하게 된 게 어떤 외국분 이후로 시작된 전통이라는데, 비전공자인 나는 잘 모르겠다.
<운수 좋은 날>은 뻔히 다 아는 내용을 연기력 하나로 살린 훌륭한 만렙배우의 승리ㅋㅋ
<연애청산>은 다른 배우였으면 이런 연출을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연출이었다.
늘 이 배우분은 팔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움직임이 크고 두드러진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게 훨씬 더 부각되었던 듯. 자칫 산만할 수도 있었을 연출이었는데 생각보다 좋았다.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그립은 흘긴 눈>은 그냥 보면서 언니 사랑해요 우와 멋있다 이생각밖에 안듬 ㅋㅋㅋㅋ 매번 연기하실 때마다 눈물연기를 정말 잘하시는데, 어쩜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싶다.
워터프루프 마스카라 사드리고 싶었음 ㅋㅋㅋㅋ
<정조와 약값>은 압도적인 연출의 승리.
걸어가는 장면에서 나란히 서서 몸을 흔드는 것.
의자 하나를 사이에 놓고 방을 나누는 것. 그 덕분에 주부가 부지런히 의자 이쪽과 저쪽편을 오가는 것.
때로 해설자가 된 것 처럼 나란히 서서 해설하는 방식은 소설로 된 것을 극으로 옮겼을 때 이분들이 주로 쓰는 방식인 것 같다. 꼭 의도해서는 아니겠지만,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나누어 말을 하고 자연스럽게 극 중 배우로 돌아가는 그 방식이 너무 좋다.
사치하지 말자.
타인에게 지나치게 기대하지 말자. 그리고 그것에 부합하지 못했다고 화내거나 탓하지 말자.
오늘 산 스케치북 한 권을 가득 채우자. 두 권도 좋고, 세 권도 좋고.
나를 속이지 말자. 덧없다.
-=-=
사실 일기라는 건 오늘 좋으라고 쓴다기보다, 되돌아 봤을 때 더 좋은 것 같다.
그래 까놓고 말해서 힘들어. 내가 노력하지 않았다는게 힘들고,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다는 것도 힘들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힘들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도 힘들어.
그래서 한 해에도 절취선이 있잖아. 새해잖아. 새해라잖아. 1초 차이로 한살 더 먹는다잖아. 힘내야지 어쩔건데.
절대 앞으론 쓰지 않을 줄 알았던 지우개를 다시 끄집어내고, 연필과 샤프도 꺼내고, 4B연필을 깎았다.
응. 나는, 이제 선을 잘못 긋는 것을 두려워하고, 좀 더 완벽해지길 원한다.
다시 수정할 수 있길 원하고, 되돌릴 수 있길 원하고, 내가 사과하면 그것이 받아들여지길 원한다.
작년은, 2011년은, 그리고 4/4분기는, 나에게, 조금 가혹했다.
그래도 그를 통해 배운 게 있다면,
자존심을 굽혀서 얻으려고해서까지 얻을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 있다는 것과,
내가 시야가 아주 좁을수도 있다는 것과,
의외로 믿음이라는 건 쉽게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과,
절대로 단기간에는 이룰 수 없는 것이 많이 있다는 것들.
자존감이 낮아서 착하고 친절하고 남에게 상처주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좋아, 다 받겠지만,
착한 게 제일 좋음. 난 착해지고 싶음. 착한게 쫭이라능! 하지만 앞서서 우선 뭘 좀 열심히 하고나서 착하든가 말든가 하자' ㅡ'-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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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가 쫭이라능!
무심코 퍼온 좋아하는 시 두 개가 왜 다 황지우야... 난 분명히 기억을 몹시 더듬었는데...
황지우 시집 사야지! 돈 생기면 다 사야지! 많이 사야지! 얍얍얍!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은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