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메뷔란 단어는 내겐 낯선데, 과연 남들에게도 낯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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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뿌연 수증기 속에서 낡은 결심이 날을 세웠다. 헤어지자.
거울을 본다.
언제 이렇게 확고한 이목구비가 생기고, 눈 아래가 짙어지고, 입이 앙다물어지게 되었을까. 고등학교 때의, 자기고집과 비대한 자아에 시달리는 그, 입을 헤- 벌린 채로 앞을, 칠판을, TV를 바라보던 그 얼굴은 어디로 간 걸까.
머리를 대강 쭉 짜서 물기를 털고 욕실을 나섰다. 어디서 타다다닥 발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같이 산지가 언젠데 아직도 내가 크게 움직이면 꼬리가 빠지게 화다다닥 고양이는 저만치 도망가서 서랍장 아래에 숨는다.  
부재중 전화가 두 통 와 있다.
수건으로 머리를 둘둘 말고 유태인이 되어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루- 고전적인 신호음이 대여섯번,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의 '여보세요-.;
전화를 걸긴 내가 걸어놓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오늘도 많이 피곤했냐는 둥, 저녁은 먹었냐는둥, 부지런히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 순순하게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이렇게 온 몸으로 웅변하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조금의 감동도 받지 못하는 내가, 과연 오롯하게 정상일까. 
어느새 수건이 느슨해졌는지 어깨에 물이 떨어진다.
'이제 그만하자.'
그래, 어딘가의 회로가 크게 설계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상처받은 얼굴을 통해서만, 아, 내가 정말로 사랑받고 있었구나, 하는 걸 확인하고, 안도하게 된다. 이건 어쩌면 습관이다.
대답이 없다.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냥 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까지 한참을 말이없다가, 그가 나를 불러세웠다.
'그거 혹시...'
잠깐을 또 망설이더니, 조용하게,
'그 남자 때문이야?'
그 남자? 무슨 쓸모없는 오해라도 한 걸까. 
'무슨 소리야?'
'그 남자한테 돌아가는 거잖아. 사실... 다 알면서도 내가 억지로 붙잡아 둔거야. 그래,... 그럼 가 봐.'
조금 비장하게, 그래서, 조금 웃기게.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가 말하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짐작가는 바라곤 전혀 없었다.  
'무슨...'
'그래, 그 남자랑 있을 때 넌 참 행복해 보였지. 잘 지내라.'
상처받은 목소리, 하지만 안도하기보다 불안해졌다.
무슨 소리- 뚝. 끊어진 전화를 다시 걸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또 훌쩍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고, 다시 주말이 되돌아왔다. 다이어리를 폈다. 늦게 술약속이 하나 있는 걸 빼면 하루종일 간만에 아무 일도 없었다. 온 몸에 힘을 빼고 털썩 몸을 던져 누웠다가, 일주일 전에 헤어진 남자가 붙여준 천장의 야광별에 시선을 붙들렸다.
그 남자?
누구를 말하는 걸까.
문득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내겐 생경한 이름도 꽤 많았다. 그래서 늘 이름 뒤에 수식어를 붙여 폴더에 분류를 한다. -우유아줌마 같이 알기 쉬운.
가족, 직장, 과거 아르바이트의 지인들, 중학교, 고등학교의 지인들, 초등학교 폴더도 따로 있다, 그리고 기타 폴더를 열었다.
그냥 분류하기 애매한 사람들의 집합이다.

스크롤을 죽 내리다가 '최재현-보고싶다'를 찾았다.
보고싶다. 
보고싶다.
보고싶다.
절대 내가 저장할 리 없는 수식어. 입에 익숙하지 않은 이름. 소름이 쫙 돋았다. 뭐야, 내가 술김에 뭘 잘못 저장했나.

대화문자목록으로 들어갔다. 텅 비어있었는데 문자보관함에 저장된 문자가 5개 있었다.
'수연아, 보고싶다. 내일 포도길 앞에서 3시! 지각하면 주거써.'
'수연아, 보고싶다. 내일 포도길 앞에서 1시! 너 한번만 더 늦어봐.'
'수연아, 사랑한다. 내일 포도길 벤치에서 봐.'
'수연아, 보고싶다. 오늘 저녁 포도길 9시!'
'야, 최재현, 지금 어디야, 나 지금 포도길인데.'

뭐야. 내 이름은 수연이가 맞다. 문자에 찍혀있는 날짜는 고작해야 9달 남짓 전이다.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까. 정말 그럴까.
섬칫해서 폰을 꺼버리고 책상 서랍의 일기장을 꺼냈다.

2010년, 작년의 일기장을 펼쳤다.  



일기장은 책등이 너덜거리도록 절반 넘는 페이지가 뜯겨나가고 없었다.

섬뜩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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