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은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일단, 책 등이 너무 예쁜 책이다.
책이 굵기가 꽤 되니까 할 수 있는 디자인이겠지만, 책 표지보다 책 등이 열 배는 더 마음에 든다.
원래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기지 못한 책은 리뷰를 쓰지 않지만,
절대로 끝까지 읽을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서서, 그냥 쓴다.
일단 조금 종교적이다. 주인공의 동생만이 종교적이지만 꽤 종교적인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종교를 강압하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거슬리진 않았지만, 의외로 종교적이었다.
문장은 좋다. 이야기를 잘한다. 스토리도 좋다. 인물들도 다 살아 있다.
근데 인물이 너무 많다. 이름도 다 비슷하다. 내 기억력을 시험한다.
1974년 8월 7일, 필리프 프티가 세계무역센터 빌딩들 사이를 줄타기 한 사건이 중심 소재다. 그런데 어쩐지 그냥 그건 흘러가는 이야기처럼 취급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좋은 문장과 좋은 이야기인 건 알겠는데,, 좀 지루하고 따분해서 끝까지 못 읽겠다.
좋은 문장을 쓸 줄 안다는 건 문장을 매력있게 조합할 수 있다는 이야기라서,
소제목도 한결같이 매력적이고, 제목까지 매력적이다.
몇 가지 소제목만 나열해 본다.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천국이 싫다는 것이 아니라 이곳이 좋습니다.'
'거대한 지구를 영원히 돌게 하자.'
'이건 그 말이 지은 집이다.'
p.55
"두려움 조각들이 사방에 떠다녀." 그가 말했다. "그건 먼지 같아. (중략) 먼지는 분명 거기 있고 사방에서 내려와 모든 걸 덮어버리지. 우리는 먼지를 숨 쉬고 먼지를 만지고 먼지를 마시고 먼지를 먹어. 하지만 너무나도 작기에 우리가 알아보질 못하는 거야. (중략)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거야. 잠시 그대로 서 있으면 바로 거기 있어, 이 두려움이, 우리의 얼굴과 혀를 뒤덮으며 말이지. 우리가 멈춰서서 이 두려움을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절망에 빠져버리게 될 거야. 하지만 우리는 멈춰 설 수 없어. 우리는 계속 가야만 해."
p.63
그녀는 후두암으로 목소리의 대부분을 잃었다.
p.72
만약 가난한 사람들이 진짜로 예수의 살아 있는 이미지라면 왜 그들이 저렇게 빌어먹게 비참한 건데? 말해 보라고, 코리건. 왜 저들이 저렇게 거리에 서서 자기들의 불행을 다른 세상 사람들 앞에서 다 보여 주고 있는 건데?
p.78
나는 대학 시절 언젠가 들었던 신화가 떠올랐다. 세상에는 서른여섯 명의 성자가 숨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보잘것없는 사람들, 목수, 구두장이, 양치기의 일을 하며 살고 있다. 그들은 지상의 슬픔을 견뎌내고 있지만 모두 하느님과 소통하는 통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어느 숨겨진 성자는 잊혀졌다. 그 잊혀진 성자는 홀로 남겨져 그가 너무나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소통의 통로를 가지지 못한 채 힘겹게 싸우고 있다. (중략) 동생은 홀로 슬픔을, 이야기들의 이야기를 견뎌내고 있었다.
p.301
"혹시 뉴욕 다운타운 근처에 계십니까, 선생님?"
"누구세요?"
"혹 우리를 위해 위를 쳐다봐 주실 수 있나 해서요?"
p.411
그냥 거기 서서, 정확하게 줄의 중간 지점, 양쪽 타워로부터 100피트 되는 그곳에 서서 눈을 감고 몸을 정지하자 줄이 사라졌다.
(중략)
그는 그가 오직 첫 발걸음에 대해서만 생각했었다는 것을, 마지막 발걸음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여전히 그 위 그곳에 있을 것이다. 슬리퍼를 신고, 검은 발로, 민첩하게. 문득문득 그럴 것이다. 고속도로를 운전하다가, 또는 폭풍이 오기 전 판자로 오두막 창문에 덧물을 대다가, 톤태나의 줄어들고 있는 초원 그 키 큰 풀밭 안에서 걷고 있다가, 또다시 공중에 있을 것이다. 발가락 사이로 팽팽한 케이블 줄을 느끼며, 바람과 서로 가로질러 엮이며, 불현듯 느끼는 높이감. 그의 아래로 펼펴지는 도시. 그의 기분이 어떻든, 어느 곳에 있든, 뜻밖의 순간에, 그것은 되돌아올 것이다.
1990년 출판된 책이다. 내 출생년도 전후로 있었던 배우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다.
중고서점에 갔다가,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들이 붕뜨지않게 하려면, 사례집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냉큼 집어온 책이다.
책의 가치가 그 책의 가격으로 결정되는 건 아닐텐데, 싸게 샀노라며 냉큼 접어가며 읽었다.
이런 낡은 책들을 읽으면, 그 내용보다, 시간을 먼저 인식한다.
그 때의 이대부고는 머리를 길러도 되는 자유분방한 학교였고,
그 때의 이대 사학과를 졸업한 선배는 이 책을 냈고,
그 때의 산울림소극장에서 최초로 고도를 기다리며가 공연되었단다.
그냥, 인터뷰를 모아놓은 작고 낡은 책인데도, 참 여러가지 군상이 보여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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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을 하다 우연히 '구히서'는 오역이 그냥 필명으로 굳은 거고 작자의 본명은 구희서씨라고 한다.
그는 "순수한 것을 보면 기분 좋다. 나쁜 연극을 봐도 좋다"고 했다. 강단 비평 쪽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말이다. 연극이란 장르의 순수성에 대해 말했다. 그의 마음에 와 닿은 무대는 "난폭, 섹스 없이 깊은 감정을 미묘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영상, 짓거리가 과한 것은 싫다"며 "내 시대의 미적 기준이 좋다"고 했다."(한국일보 2010년 인터뷰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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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5
그중에서 그가 잊지 못하고 아직도 감탄하는 선배는 김선영씨다. "그분 연기는 무대에서 하는 것만 보면 저게 연기인지 진짜인지 도무지 구별이 안가요. 나도 처음에는 그 양반 연기가 어디서부터 연기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구별을 못했습니다. 연습하시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죠. 연습할 때 하나하나 역의 성격, 습성, 버릇을 구축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무대 위의 그 인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깨달을 수가 있었죠. 그건 감탄을 아무리해도 모자랄 정도였어요. 난 그 양반 흉내를 낸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감탄하고 반해서 따라다녔습니다."
p.87
단란한 가정, 스캔들 없는 미남배우가 된 것은 '내가 그렇게 결심했기 때문'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p.98
무대에 나설 때의 특별히 집착하는 버릇은 없다. 오히려 나는 모든 버릇을 버린다. 공연할 때면 게으르려고 애쓴다. 사람도 안만나고 일도 안하고 그냥, 철저하게 게으르려고 한다. 깨질까 부서질까 염려하듯 몸을 아끼고 나 자신을 위해 준다.
연극인이 살아있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연극이 살아있고 그 관객이 무대를 요구하는, 그 요구가 모두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있는 한 연극은 있고 또 있어야 한다. 이건 일종의 생리적인 필요다.
내가 연극을 하는 가장 큰 이유 그 역시 하나의 생리적인 필요다.
지금 이순간 우리의 상황, 뒤섞이고 갈팡질팡하는 환경의 핵심을 찾아내는 젊은 작가를 만나고 싶다. 그래서 그 속에서 내 역을 찾고 싶다. 상황에 몰려 그 상황을 가장 아프게 그러나 맑게 겪어나가는 성격의 주인공을 찾고 싶다.
p.234
나는 대학시절 연극훈련을 많이 한 편이다. 학교과정에만 의존한다면 1년에 1번 정도가 고작이었을 것이지만 나는 처용이라는 써클을 만들어 1년에 6편 정도, 모두 30편 가까운 작품을 해보고 졸업을 했다. 그러나 실험에 처음 들어갔을 때 노역을 한다던지 <허생전>같은 전통양식의 작품을 하면서 새로운 억양을 배워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민예를 만들어서 또 한번 새로운 고생을 했다. 판소리 탈춤 가곡가사를 배우고 비극적인 작품이나 표현만이 아니라 희극적인 감각을 키워야했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을 무대현장에서 배우면서 일을 했다.
P.236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배우는 무대를 완성시키는 마지막 창조자다. 무대 공연현장에서 관객과 만나서 작품을 전달하는 것은 배우이므로 언제 어떤 경우에라도 배우는 주요하다. 나는 배우의 중요성이나 보람 같은 것을 얘기할 때 배우의 삶은 1백년 이상, 다른 사람들의 몇배를 사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한다. 배우는 연극 속에서 수많은 삶을 살기 때문이다. 좋은 배우는 연극 속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많이, 그리고 철저하게 살 수가 있다.
P.249
제한된 내무반 생활에서 나는 정치, 사회, 경제의 원형을 발견했고 인간이 폭력 앞에 얼마나 비굴해질 수 있는가 지성이니 지조니 하는 것들이 얼마나 쉽게 무너져 내리는지를 보면서 인간의 속성 같은 것들을 생각했다.
나는 어느날 도대체 내가 어떤 말을 얼마나 하는지 세어본 적이 있다. 50개 미만의 간단한 일상 용어로 하루가 간다는 걸 깨달았다.
p.267
그의 얼굴 그의 모습에는 꾸밈 이전의 진짜 같은 어떤 현장성이 있다. 그의 연기 그의 등장은 좋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그의 존재는 뭔가 실제의 부피를 갖고 있다.
배우가 연기를 잘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보다 오히려 극중에 그 인물이 무대에 직접 나와 좀 어색해하는 것 같은 분위기다.
p.290
나는 멋있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연극을 처음 보고 연극배우가 되겠다고 나서게 된 것은 최성연씨가 권해준 드라마센타의 <햄릿>(62)을 보고나서였다. 기가 차게 좋았다. 다음날 또 봤다. 최상현씨의 햄릿은 또 더 좋았다. 연기란 저런 것이다. 저런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연히 큼직한 배역만을 생각했으나 오샤량선생은 내게 대사라고는 10마디뿐인 국서의 이웃 친구 영식역을 주셨다. 그나마도 하루 연습할 때마다 한마디씩 잘려나가더니 나중에는 겨우 한마디만 남았다. 그동안 내 나름대로 고민도하고 투정도하다가 나중에는 내 마음을 가다듬어 열심히 했다. 첫날 공연을 끝내고 들어오는데 오선생은 눈에서 불이 번쩍나게 따귀를 때리셨다. 대사가 엉망이라고 야단을 하시는 것이었다.
자료로 그냥 써먹고 말기엔 아쉬운 책이다.
좋은 이야기가 많은데도, 다 옛날 인물과 지나간 이야기들이라 묻혀버리는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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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이야기, 작부심, 그런 것들과
불편하지 않은 이야기, 독자가 보고 싶은 이야기, 철저한 로맨스나 적당하게 슬프고 적당하게 아름다운 이야기들,
그 균형을 대충 알 것 같다.
일상에서 모두가 서로에게 감추고 있는 어떤 영역이 있다.
가령, 남들 앞에서 똥을 싸진 않는다.
그래서 소설에서 굳이 그 이야기를 매번 언급하지 않아도 괜찮은거라고 생각한다.
우린 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은 알 필요가 있지만 주인공의 소화상태 배변상태를 알 필요는 없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굳이 불편해질 필요는 없는 거다.
일상적으로 남들 앞에서 가식을 떠는 만큼만,
글과 영상에서도 가식을 떨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가식은 나쁜거라고, 또 한동안의 너무 솔직한 무리들에 휩싸여 있다보니 마냥 그렇게 생각해봤는데,,
좀 멀찍이 떨어져서 보니까, 아니, 가식은 좋은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