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기왕 <초콜릿 코스모스>와 <흑과 다의 환상 상/하>를 읽었으니 온다 리쿠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기로 한다.

목요조곡 中

40대 중반이지만, 여자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여자가 여자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을 당연하게 해내는 여자와 노력이 필요한 여자가 있다. 시즈코는 보기와는 다르게 영리하고 터프한 여자라서, 노력도 하고 있겠지만 그녀의 회로에는 그 에너지가 원래부터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리코는 다르다. 아름다워지는 기쁨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워지고 싶다고 바라기도 하지만, 그것에 에너지를 쏟을 만한 회로가 자기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 그것은 금새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 목요조곡 p.12



결말이, 온다 리쿠 다워서 조금 지루했지만 괜찮게 읽었다. 너무 상황 자체가 억지스럽긴 하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中

요컨데 '난해함'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더해진 것이다. 난해함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권위와 논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기 힘든 페로몬을 발산하는 듯하다. -p.48

우화같은 분위기. 숨겨진 시선, 연극이 끝났을 때의, 예상했던 착지점과의 현혹적인 어긋남 -p.49

문득 목덜미 뒤에서 뭔가가 꿈틀대는 감촉이 느껴졌다. 익숙하고 친근한 정겨운 감촉이다. 이런 순간은 항상 갑자기 찾아온다.
다나베세이코의 에세이였던가. 이런 느낌을 두고,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 같은 감각, 이라고 했다. 손을 내밀어 살짝 고양이를 쓰다듬으려 하지만 항상 잽싸게 달아난다. 지금 당장 그곳에 아이디어가 있는 것은 알지만 섣불리 솓을 뻗으면 사라져 버린다. 고양이가 그 곳에 있을 때는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고양이 따위 신경쓰고 있지 않은 듯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슬그머니 다가가는 것이다.
그는 고양이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가까이 있다. 아주 가까이. 아름다운 고양이가.
p.59-60

남자는 마음 한구석에서는, 과거의 여자는 모두 자기 것이고 모든 여자가 틀림없이 자기에게 미련을 갖고 있다는 환상이 있기 때문에 옛 여자가 '만나고 싶다'고 하면 주저없이 만나러 가기도 하지요. (중략)
여자는 미래를 살아가는 동물이니까. 그녀들에게 옛 남자는 어차피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 과거거든. 실제로 그런 여자들을 보면 정말 잊어버리더군. 재조정 정도가 아니고 아예 기억에서 말소당하는 거야. 우리 남자들은.
p.80-81

남자들은 오해를 하곤 하지. 이 정도의 여자라면 나도 감당하겠구나 생각하는 것 같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말을 걸기 때문에 그녀 스스로도 오해를 하게 만드는 거지. 그런 여자의 자만심은 대단해. -p.122

(전략) 이렇게 되면 역까지의 길을 되돌아가서 꼼꼼히 찾는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고 우산을 펼쳤더니 찰랑 하며 열쇠가 떨어졌다. 이 장면 어딘가에 사용할 수 없을까. -p.129

제복이라는 건 참 편리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것을 입는 순간 머리는 일에 대한 생각으로 바뀌고 같은 일을 하는 다른 동료와의 연대감도 생긴다. 그리고 무엇보다 편리한 것은 그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p.243

밖에서 책을 읽다 보면 늘 이상한 심정이 된다.
밖에서는 항상 시간이 흐르고 풍경이 변화한다.(중략) 마치 강물에 나무토막을 꽂은 듯이 혼자만 물결을 거슬러 멈춰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는 것이다. (중략) 그런 느낌의 정체가 자신의 정신 활동이라고 생각하면 육체란 얼마나 무방비 상태로 외계에 노출되어 있는가 싶어 놀랍다.
어느새 몸이 조금씩 젖어들고 있었다. -p.312

나는 이 줄리엣의 순진함이 부러워요. 그보다 오히려 얄밉다고 해야겠지만. 첫사랑에 들떠서 그 사랑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자신이 믿는 사람을 위해 죽어 가요. 그 어리석음이 얄미워요. 자신이 순수하다고 여기는 오만함이 미워요. 사랑이 끝났을 때의 환멸이나, 살다가 느끼는 권태도 알지 못하고. (후략)
p.365




연극 이야기만 나오면 신이 나는 온다 리쿠씨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나도 신나게 읽었다.
그런데 역시 좀. 그렇게 긴 내용 동안 사건은 그렇게 더디 진행되면 숨막힌다.
그래도 이것도 온다리쿠스러워서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남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은 아니지만.. 

<헤엄치는 물고기>나 <도미노> 같은 책들은 발췌하고 싶었던 글이 없었나보다. 기록이 없다.
역시 갑자기 페이지를 기억해둬야 겠다는 생각이 들 때, 아, 내가 이 책을 재밌게 읽고 있구나, 하는 실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삼월의 붉은 구렁을>도 꽤 재밌게 읽었을 텐데 기록이 없다. 사라진걸까. 아니면 문장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밤의 피크닉>도 그렇게 몰입해서 읽지는 못했지만, 끝이 뿌듯해서 좋았다. 이것도 기록은 없지만.
<나비>는 원래 단편집을 좋아하지 않는 나와, 격하게 판타지스러워진 작가님의 충돌로 Fail. 엉엉.


이러니저러니 해도 읽다보면, 왠지 동경이 느껴지고, 왠지 공감이 느껴지는 작가다. 좋다.
이 다음엔 <코끼리의 귀울음>을 읽자.
의외로 추천을 많이 해 주는 것 치곤 아직 손이 안 가서 못 읽은 책. 


읽은 것 중에선,
삼월시리즈 중 <삼월은 붉은 구렁을> 과 <흑과 다의 환상 上,下>
<초콜릿코스모스>(좀 판타지긴 하지만)

일단 이렇게가 최애작+추천작.


짐이 많아서 오늘은 도서관에 못 들렀다.
내일 들렀다 와야지.


요즘 여러모로 우울한 일이 많았는데, 어쩐지 이 블로그를 시작하길 잘한 것 같다.
음음, 안정된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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